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3:11:59

메틴 오크타이

튀르키예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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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메틴 오크타이
Metin Oktay
출생 1936년 2월 2일
튀르키예 이즈미르 카르시야카
사망 1991년 9월 13일 (향년 55세)
튀르키예 이스탄불
국적
[[튀르키예|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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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이즈미르스포르 (1954~1955)
갈라타사라이 SK (1955~1961)
팔레르모 FC (1961~1962)
갈라타사라이 SK (1962~1969)
국가대표 36경기 19골 ( 튀르키예 / 1955~1968)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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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현역시절 가공할 득점력을 자랑했던 갈라타사라이 SK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손꼽히는 선수이다.

2. 클럽 경력

2.1. 초기 경력

오크타이는 1952년 자신이 태어난 도시인 아즈미르의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오크타이는 아즈미르의 축구클럽인 알티노르두 FK의 원클럽맨이자 레전드인 사이트 알티노르두에 대한 존경심으로 등번호 8번을 달고 축구를 시작했다.

이때 알라차티의 한 마을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2골을 넣고 구단주에게 받은 2.5리라가 그가 축구선수로서 받은 첫 돈이었다.

이후 오크타이는 다른 팀과 계약을 맺은 뒤 활약하던중 청소년 대표팀에 소집되었는데, 청소년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으로 자국의 타팀들에게 이적 제의를 받게되었고 이즈미르스포르로 이적한다. 이곳에서 그는 54-55 시즌 18경기 17골을 꽂아넣으며 단숨의 팀내 최다 득점자가 되게된다.

그 활약으로 1955년 오크타이는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하게 된다.

2.2. 갈라타사라이 SK 1기

1955년, 오크타이는 갈라타사라이에 입성하였는데, 당시 쉐보레를 받는 대가로 5년 계약을 체결했다 한다.
오크타이는 1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부 리그 첫시즌 19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괴력을 과시했으며 그 시즌 갈라타사라이 SK가 리그 우승에 성공하였다.

이후 무려 4시즌간 득점왕을 기록하였는데 갈라타사리아 1기의 마지막 시즌인 60-61 시즌에는 30경기 36골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게 된다.

갈라타사라이 SK의 첫 기록은 164경기 174골의 기록을 남겼다

2.3. 팔레르모 FC

이후 오크타이는 1961년, 팔레르모 FC로 이적하여 해외 무대에 도전장을 내게된다.
팔레르모 FC 시절 오크타이는 로마를 상대로 오버헤드킥을 작렬시키는등의 활약을 했지만, 지속적인 부상에 시달리며 12경기 3골에 그치며 명백히 실패하였다.

그렇게 입지를 잃어버린 오크타이는 갈라타사라이 SK 리턴을 결심하게 된다.

2.4. 갈라타사라이 SK 2기

팔레르모 FC에서의 실패 이후 1962년, 오크타이는 갈라타사라이 SK로 돌아왔다. 그러는 와중에 이즈미르스포르 리턴을 바랬던 아내와의 불화끝에 이혼하는등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오히려 리그 26경기 38골을, 시즌 39경기 47골을 기록하며 튀르키예 리그를 폭격하며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이후 오크타이는 매년 시즌 20골 이상을, 리그에서는 10골 이상을 넣어주는 넣는 괴력을 보이며 팀의 4번의 튀르키예 컵 우승과 2번의 수페르리가 우승을 견인하며 갈라타사라이 SK가 역사를 쌓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그는 1968-69 시즌 은퇴를 선언하며 축구화를 벗었다.

3. 국가대표 경력

오크타이는 1954년 4월 11일, 레버쿠젠에서 열린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처음 튀르키예 대표팀의 옷을 입었다. 그 경기에서 오크타이는 2골을 터뜨리며 튀르키예가 벨기에를 4:0 꺾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뛰어난 활약으로 1955년 12월 8일, 포르투갈과의 친선전에서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데뷔한다. 이 경기에서 그는 팀의 2번째 골을 넣으며 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전 4경기에서 3골을 터뜨렸지만 소련에 밀려 월드컵 출전에 실패하였다.

또한 그는 1962년 10월 10일, 에티오피아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대표팀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였디. 또한 그는 1964년 11월 1일부터 주장으로 출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5경기에서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2년 6개월간 국가대표팀에서 뛰지 않았고 1968년 12월 11일, 1970년 FIFA 월드컵 북아일랜드와의 예선전에서 마지막으로 경기를 뛰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4. 이후의 삶

은퇴 이후 오크타이는 축구계에 종사하면서 갈라타사라이 SK에서 보조 코치 일을 하기도 하였으며, 부르사스포르에서도 코치로 활동했다.

1984년부터 2년 동안은 갈라타사라이 SK 기술 이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91년 9월 13일, 이스탄불에서 차를 몰던 오크타이는 차사고로 사망하였다. 향년 5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