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신종
만력제 시기에 있었던 3번의 큰 전쟁을 말한다.
몽골 지역에서 일어났던 보바이의 난(1592), 조선에서 있었던
임진왜란(1592~1598),
묘족 반란 중 가장 컸던 양응룡의 반란(1597~1600)이 그것이다. 특히 양응룡의 반란 사건은 영화
동방불패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만력 삼대정은
장거정의 개혁(근데 그 장거정도 옥의 티가 있으니 문제.)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명나라가 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근데 이후에도
서광계,
원숭환 등의 노력으로 회생할 기회는 있었다.)
보바이(哱拜)는 원래 몽골족 사람으로 가정제 때 명나라에 항복하였으며, 이후에 공을 쌓아 도지휘에 올랐다.
만력제가 즉위한 후 유격장군에 올랐으며 영하 지역을 관장하였다. 만력 19년(1591년) 몽골족이 침입하자 보바이는 3천명의 병력으로 몽골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병력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보바이는 독립할 마음을 품게 되었고, 1년 뒤인 만력 20년(1592년) 2월 18일 반란을 일으켰다. 보바이는 당형 등을 죽이고 총병관 장유충을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중위, 광무, 영주 등을 점령하고 몽골족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반란의 진압이 더디자 명 조정은
마귀를 보내 몽골족을 공격하고 지원을 차단하였으며,
이여송을 영하총병으로 삼고 진압작전을 총괄하게 하였다. 7월, 마귀 등이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웠으며 영하성을 포위한 다음 수로를 터뜨려 성을 물에 잠갔다. 보바이군은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식량이 끊기자 서로 죽이고 배신하여 투항하려 하였다. 같은 해 9월 18일 마침내 이여송이 성문을 돌파하고 보바이의 저택을 포위하자, 보바이는 자살하고 그의 아들 등은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보바이의 난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양응룡의 가문은 당나라 이후 대대로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파주를 다스렸는데, 파주는 사천, 귀주, 호북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만력 초기에 양응룡은 파주선위사사에 오른 후 사실상의 독립세력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만력 25년(1597년) 반란을 일으켰다. 명 조정에서는 양응룡의 반란 초기에 방침을 분명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양응룡은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 묘족을 회유하여 사천, 귀주, 호광 등의 요새 수십 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만력 26년 사천순무 담희사가 양응룡의 공격을 한차례 방어하였고, 만력 27년 귀주순무 강동지가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명 조정은 강동지를 파면하고 이화룡을 병부시랑에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을 총괄하게 하였다. 만력 28년(1600년) 2월, 총독 이화룡의 지휘 아래 명나라의 대군이 진격을 시작하였다. 4월,
유정이 이끄는 군대가 양응룡의 부대를 격파하고 양응룡의 본거지를 포위하였다. 6월, 성이 함락되자 양응룡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알고 자살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혔다. 이후 명은 파주를 준의와 평월로 나누고 각각 사천과 귀주에 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