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조노 마사키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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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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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마에조노 마사키요 前園 真聖 | Masakiyo Maezo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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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3년 10월 29일 ([age(1973-10-29)]세) | |
일본 가고시마현 사츠마군 도고초[1]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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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0cm / 체중 68kg | |
직업 | 축구 선수 ( 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 (1989~1991 / 유스) 요코하마 플뤼겔스 (1992~1996) 베르디 가와사키 (1997~1998) → 산투스 FC (1998 / 임대) → 고이아스 EC (1999 / 임대) → 쇼난 벨마레 (2000 / 임대) 도쿄 베르디 (2001~2002) 안양 LG 치타스 (200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 |
국가대표 | 19경기 4골 ( 일본 / 1994~1997) [2] | |
SN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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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축구 선수. 가이모토 코지로에 이은 2번째 일본인 K리그 외국인 선수이다.2. 클럽 경력
2.1. J리그
마에조노는 어릴 때 일본 내에서도 큰 기대를 받던 유망주였다. 이런 기대를 바탕으로 브라질 축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일본 복귀 후 1992년 요코하마 플뤼겔스[3]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내던 마에조노는 1996년, 리그와 컵을 모두 합쳐 39경기 15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는 마에조노의 첫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이었다. 거기에 J리그 시즌 베스트 11에도 포함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 해의 활약으로 세비야 FC를 비롯한 해외 클럽으로부터 문의가 들어왔고, 마에조노도 이적을 허가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며 구단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결국 해외 진출을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운 베르디 가와사키로 이적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고, 계속해서 지지부진하자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게 되었다.2.2. 브라질 리그 진출
마에조노는 1998년 브라질의 산투스 FC로 이적해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지만, 산투스에서도 5경기 1골에 그치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다. 직후 고이아스 EC로 이적했지만, 아예 데뷔전도 치르지 못하는 등 마에조노의 수난은 이어졌고 결국 브라질 생활을 포기한다.2.3. J리그 복귀
많이 무너져 있던 마에조노는 2부 리그 소속이었던 쇼난 벨마레를 선택하며 새로운 출발을 했고, 리그에서만 11골, 시즌 도합 43경기 13골을 기록하며 다시 부활에 다가가는 듯했다. 이 활약으로 마에조노는 다시 친정 도쿄 베르디로 돌아왔지만, 1부 리그에서는 다시 조용해지며 잊혀진 이름으로 남았고 결국 팀에서 방출당하고 말았다.2.4. 안양 LG 치타스
하지만 마에조노는 이대로 자신의 경력을 끝내지 않고 계속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성남 일화 천마 입단에 도전했지만 체력적 문제가 겹치면서 좌절됐고, 최종적으로 안양 LG 치타스에 입단한다. 계약 기간은 1년, 연봉도 1억이었다. 이 이적을 통해 그는 가이모토 코지로에 이은 두 번째 K리그에서 뛰는 일본인 선수가 됐다.시즌 초에는 안양에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활약이 점점 떨어졌고, 최종적으로 16경기에서 4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시즌을 종료했다. 하지만 재계약에는 실패했고, 마에조노는 다시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나게 됐다.
2.5. 인천 유나이티드
마에조노는 결국 신생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제의를 받았고, 이를 받아들여 인천의 첫 7번이자 아시아 국적의 외국인 선수가 됐다. J리그 생활을 오래하며 일본어에 능통했던 장외룡 코치가 인천에 있어 영입에 성공했다.계약이 늦어지는 문제로 인해 스타트가 늦었는데, 정규 리그에서는 기회를 많이 못 받았지만 컵 대회에서는 많은 기회를 얻었다. 마에조노는 FC 서울을 상대로 페널티킥 득점을 기록하는 등 점차 페이스를 올렸으나 포지션 경쟁자가 당시 인천의 핵심 최태욱이었고 본인의 체력적 한계도 노출하는 바람에 출전 기회는 여전히 제한되었다. 최종 성적은 리그와 리그컵을 합산하여 13경기 1골 1도움.
결국 인천과도 재계약에 실패한 마에조노는 유럽의 팀을 모색했고, OFK 베오그라드의 입단 테스트도 받았지만 계약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되자 마에조노는 미련 없이 은퇴를 선택했다. 인천이 그의 커리어 마지막 팀이 된 것.
2.6.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도 축구 아카데미 및 여러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방송인 및 해설위원 활동도 한 바 있다.3. 국가대표 경력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유명세를 떨쳐온 선수로, 1996년 올림픽에도 출전했고 이후 성인 대표팀에서도 19차례 출장했다. 1996년 아시안 컵의 멤버이기도 하다.2009년에는 라모스 루이가 지휘하는 비치사커 대표팀에 소집되어 FIFA 비치사커 월드컵에 출장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섬세한 드리블을 비롯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으며, 킥력도 좋은 평을 받아온 선수이다. 판단력도 좋았고, 승부욕이나 근성도 지니고 있었던 선수.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체력적인 약점을 많이 노출했고 피지컬로 인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5. 기록
5.1. 대회 기록
- 요코하마 플뤼겔스 (1992~1996)
-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1994
- 아시안 컵위너스컵: 1994-95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1994~1997)
- 다이너스티컵: 1995
5.2. 개인 수상
- J1리그 베스트 일레븐: 1996
6. 여담
- 연령별 대표팀 시절부터 일본의 차세대 에이스 후보로 주목받았던 선수지만 결과적으로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다만 그럼에도 일본 내에서는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기에 K리그 시절에 마에조노를 보러 한국까지 오는 일본 팬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 마술사가 한국에 와서 공연한 뒤 수익을 인천 구단에 주기도 하는 등 마케팅 적 가치가 있었던 선수. 팀 내에서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서 평이 좋았다고 한다. 한편 안양 시절에는 한국에서 일본인 선수가 활약하는 것이 생소한 시기이다 보니 서포터가 일장기의 붉은 원이 들어간 응원걸개(일본 대표팀 경기에서 흔한 형태이다)를 걸었다가 일반팬의 항의를 받아 치우기도 했다.
- 은퇴 이후 현재에는 방송인으로도 활동 중으로 2015년에는 촬영차 한국에 입국했다가, 인천 유나이티드에 방문해 전재호, 임중용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2024년에는 골 때리는 그녀들 일본 친선팀 감독으로 다시 출연하였다. # 그리고 4:3의 스코어로 인생 첫 한일전 승리를 가져갔다.
- 2021년부터 "아저씨인데, 놀아도 될까요?"(おじさんだけど、遊んでもいいですか?)라는 유튜브 채널의 메인 출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근래에는 축구선수 대담 중심으로 운영되는 중.
- 양과자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알려져있어서 2016년에는 본인이 감수한 양과자가 편의점에 납품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