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9 11:48:15

림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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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로동신문에 따르면 동해안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남한 정부가 파악한 바로는 동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두만강 기슭 산골에서 숯을 굽는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하다가 탄광에서 광부로 취직했고,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어 만주로 가서 중학교를 마친 후 하얼빈 공업대학을 졸업했다. 이때 학비를 얻기 위해서 신문팔이에 가정교사 등 갖은 일을 다 하면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추종자였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남한에서 1970년대에 편찬된 북한 인명록에 따르면 1936년에 김일성 게릴라 조직에 입대하여 빨치산 활동을 했다 카더라. 하지만 이 시기 남한 측의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정보는 풍문에 의존하고 동명이인도 분간이 거의 안되는 개판 5분전의 상태라서 그다지 믿을 것은 못된다.

하얼빈 공업대학 졸업 직후에 해방이 이루어졌고, 잠시 서울에 갔으나 친일파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 잠시 교사로 일하다가 기술자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김일성의 눈에 들어 청진화학섬유공장 방사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정준택이나 리종옥과 비슷한 케이스. 6.25 당시에는 경공업성 일용품공업 관리국에서 일하면서 후방경제를 담당했고, 전후 경공업성 기술국장을 거쳐 1953년 김일성의 소련 및 동유럽 방문을 수행하였다. 1956년 경공업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1957년 9월 26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7월 1일, 국가계획위원장 리종옥이 경질되면서 신임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후임 경공업부장에는 전기성 부상 강희원이 이동했다. 이는 림계철이 지방산업부문에서 거둔 양적 성공 실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종옥이 처벌받은 것은 아니라서 당부위원장으로 오히려 승진하여 열성자대회에 열심히 다니는 등 잘 나갔다.

1959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출석하여, 1960년을 완충기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1960년 4기 2중 전회 직후 12월 27일, 김일성이 정준택을 국가계획위원장, 림계철을 경공업위원장으로 서로 자리를 바꾸라고 지시함에 다라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정준택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경공업위원장으로 갔다. 1961년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경공업위원장 재임 시절 당시에 김일성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카더라. 그러다가 1962년 7월, 김일성이 다시 림계철을 불러 인민경제대학에서 더 공부를 하게 했다. 결국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면서 박룡성에게 자리를 내주고 짤렸으나 1964년 1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경공업위원회가 국가경공업위원회로 승격됨에 따라 다시 국가경공업위원장에 임명된다. 1964년 3월, 최고인민회의 3기 3차 회의에 참석하여 토론을 맡았다. 하지만 '어지간히 배짱이 생겨' 일을 김일성의 허락을 받지 못한 죄로 김일성의 질책을 받고 1966년 1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발표됨에 따라 국가경공업위원회가 폐지되고 경공업성이 설치됨에 따라 국가경공업위원장에서 해임된다. 후임 경공업상으로 리량숙이 임명된다.

이후 평안북도 창성군으로 내려가서 굴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에서는 이때 림계철이 난치병을 얻어 요양한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 스스로도 림계철이 인민경제대학에서 공부한 이후 신의주마이싱공장 지배인으로 일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림계철에게 은혜를 베풀어줬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계획위원장까지 하던 사람이 일개 공장 지배인으로 떨어졌다는게 은혜일리가 없다.(...) 사실 최광의 경우에도 일개 노동자로 하방돼서 굴렀던 시절을 북한 선전물에서 인민경제대학에 갔다고 하는 걸 봐서는 숙청당한 것을 돌려서 이렇게 말하는 걸로 보인다. 1962~1972년 사이에는 활동이 추적되는 것을 보아선 북한에서 정확히 언제 어떻게 굴렀는지 말을 안해서 파악하기 어려우나 1969~1972년 사이에 하방되었거나 아님 혁명화의 일환으로 잠시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1962년 10월에 평안북도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11월, 청단선거구에서 대의원 및 예산위원장으로 재선되었다. 남한에서 파악한 바로는 1963년 10월, 당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에 임명, 1966년 2차 당대표자회 집행부에 선출되었으며 1969년 2월, 이탈리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중앙위원회 위원직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 보도로 확인된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9년 5월, 내각 화학공업상에 임명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에 출두하여 화학공업에서의 대안의 사업체계의 중요성을 떠들어댔다.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5차 당대회에 출석은 했지만 중앙위원회에선 탈락했다. 1971년 11월, 중국 연료화학공업 대표단을 화학공업상의 자격으로 맞이한 것이 로동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되지만 1972년 7월 23일, 중국 화학공업 대표단을 맞이한 것이 김형삼 화학공업상이라고 보도됨에 따라 확실하게 잘렸다. 이후 다시 당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자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함경북도의 화학공업 조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후 당적수양을 더 쌓으라는 명목으로 평안남도 당위원회 제2비서에 임명되어 지방당사업을 맡았다. 그러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경공업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 경공업위원회 고문 역할을 하였다. 1979년 12월 정무원 화학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국가계획위원장 로태석이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공개된 활동은 잘 없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은퇴하여 말년에는 함경북도 행정경제위원회 고문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뭔가 하긴 했는지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자 기절하여 며칠 만에 깨어났고, 금수산기념궁전에 가서 김일성의 시신을 참배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에 림계철에게 그간 노고가 많았다고 김일성 훈장을 수여하였다. 말년에 회고록을 쓴 이후 경애하는 장군님을 충성으로 받들라는 유언을 남긴 후 사망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정확한 사망 날짜는 공개하지 않았다.

1999년 3월 25일, 로동신문은 림계철의 이력을 정리한 추모기사를 작성하여 그를 칭송하였다. 본 문서의 출처도 대부분 여기에서 나왔다.따라서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 사망도 보았고 그 이후에 활동한 것을 보아서 1998~1999년 사이에 죽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3. 여담

다섯 자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일성정치대학을 졸업했고, 아들 림경일은 정치일군이 되었다고 한다.

4. 참고문헌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