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22 22:10:51

리지찬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15년 5월 5일,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일본 구마모토 대학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년대 자료에 따르면 반일투쟁동맹 공작원으로 좌익운동에 종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사를 하였다. 해방 이후 수풍발전소 지배인이 되었으며, 김일성이 테크노크라트들을 찾아 눈에 불을 켰을 때 리종옥, 정준택, 강영창 등과 함께 스카웃되었고 1948년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리지찬의 회고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수풍발전소 현지지도를 갔던 시점까지도 일본인 기술자 2명이 일하고 있었고, 김일성이 이들을 귀국시키면 발전소 운영이 어떻게 되겠냐고 묻자 리지찬이 조선인들은 기술을 배우지 않아서 일본인 기술자들 없이는 조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김일성이 일본인 기술자들과 사업을 잘 하고 빨리 전기기술을 배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52년, 산업성이 경공업성과 중공업성으로 분리되자 중공업성 전기국장으로 발탁되었고, 1953년에는 수풍발전소 지배인을 했다. 1955년 전기성이 설치되자 전기성 부상을 지냈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59년, 내각 전기석탄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내각 중공업위원회 전력공업관리국장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2년 4월 9일, 전기석탄공업성 전기기술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김일성상을 받았다. 1977년 6월, 전력공업부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함으로 전력공업부장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선출, 정무원 전력공업부장에 유임되었다. 1978년 7월, 정부경제대표단장으로 루마니아와 헝가리를 방문했으며 1978년 8월에 다시 정부경제대표단장으로 폴란드를 방문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대의원자격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전력공업부장에 유임되었다. 1985년 11월 19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전력공업부가 전력공업위원회로 승격되면서 전력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5년 5월에 중국, 1986년 3월에 소련을 방문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재선, 전력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5월, 대의원에 재선, 전력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94년에 전력공업위원회가 다시 전력공업부가 되면서 전력공업부장으로 돌아왔다. 1994년 7월, 김일성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전력공업부가 전기석탄공업부로 다른 부서들과 합쳐지면서 신태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10기 대의원에 재선되지도 못했으며,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만 재직하던 중 2000년 3월 2일 15시 40분에 84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오랜 기간 전력공업부문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나라의 전력공업을 발전시키고 경제적위력을 강화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치사했다. 김정일이 영전에 화환을 보내주었으며 시신은 전력공업부장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부고가 발표된 점, 신속하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점, 그리고 80이 넘은 그의 나이를 보면 고령으로 은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지만원은 이 사람도 광주에 파견된 광수라고 주장한다. 뭐 그러려니 하자.

4. 참고문헌

  • 안효순, 북한인물록(서울: 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