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鍾木북한의 외교관. 정무원 외교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였다. 강석주의 선배와 같은 인물. 다만 대미 외교 전문가였던 강석주와 달리 리종목은 유엔 및 3세계 외교의 전문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1928년 7월 31일에 강원도 고산군 봉련리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막노동하면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빈농의 아들로, 봉련리 문성소학교를 다녔으며 학교 소사, 원산역 철도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안변고급중학교를 다녔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내무부에 들어가 참전했다고 한다. 그 공인지 전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 1956년 8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처음에는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가 1961년 9월부터 대외사업 일군으로 발탁되었는데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일개 머슴의 아들에서 외교관이 될 수 있게 한 북한 정권에 매우 충성하였고 이 덕분에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카더라. 굉장히 박식하여 김일성이 어느 소국을 대면서 이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갑자기 요구해도 언제나 막힘없이 대단하여 김일성이 모두 리종목을 본받으라고 교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외무성 참사실 연구원, 부국장, 국장, 부국장을 거쳐 이후 정무원 외교부 부부장에 이르렀다.1973년 28차 유엔 총회에 북한 대표로 출석, 한반도 문제의 유엔 회부는 내정간섭이며, 한국통일부흥위원회 및 유엔사의 해체, 주한미군과 모든 외국군의 한반도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및 친공산권 11개국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서방 측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인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자진해체 권고 및 남북한 동시가입을 환영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여야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와 헨리 키신저가 한국통일부흥위원회를 자진해체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표결은 없었고 어떠한 결의안도 채택되진 않았으나 1974년에 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결국 해체되었다. 이는 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이미 여러 나라들이 탈퇴하고 남은 나라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쓸모가 없다고 여긴 미국 측이 해체에 합의했기 때문이지 북한의 외교적 승리는 딱히 아니었지만 북한에선 당연히 그런거 알바 아니었고 외교적 대승이라고 좋아 죽었다.
그외에 1970년대에 <근로자>에 김일성을 숭상하는 여러차례의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김씨 일가 우상화에도 기여했고 그의 부고에서 북한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칭송해주었다.
하지만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라 북한 말에 따르면 유엔총회 표결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김일성, 김정일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때 비판당한 것을 바탕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것을 기본 노선으로 활동했다 카더라. 1974년 11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5년 11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이후 1975년 30차 유엔총회에 출석하여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유엔군사령부 해체, 미군철수를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고, 북한에서는 이것만 줄창 선전하지만 해당 총회에서는 동시에 서방이 제시한 남북대화 촉구와 항구적 평화보장을 위한 협정개시 결의안 역시 통과되었다. 여튼 김정일은 크게 기뻐하며 리종목 및 외교일군들을 불러모아 기념사진도 찍었다.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6월, 비동맹회의 외상회담에 참석, 남한의 주한미군 핵무기 철거를 주장했으며,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시계도 리종목에게 하사했다. 1984년에 외교부 제1부부장에 임명, 11월에는 소련을 방문, 국경조약 및 북소교류계획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1985년 7월 15일 18시에 57세를 일기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리종목동지는 (...) 당과 공화국정부의 대외적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동지는 오래동안 대외사업부문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우리 당의 대외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사업하였다. 리종목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후임 외교부 제1부부장으로는 김충일이 임명되었다가 그가 서기실로 차출되면서 강석주로 교체되었다.
그의 때아닌 죽음에 대해서는 김정일의 세습을 지지하던 리종목을 반김일성 군부세력이 살해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왔는데 1985년에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세력이 북한에 있었을지는... 사실 남일, 김용순, 김양건 등 북한 엘리트가 사고로 죽을 때마다 나오던 상투적 음모론에 가깝다. 이보다는 김정일 특유의 연회 정치 때문에 술먹고 음주운전하다 죽었다는 설명이 더 그럴듯하다.
어쨌거나 외교판에 세운 공훈을 인정받아 7월 16일에 김일성이 화환도 보내주었고, 김정일이 자식들을 당에서 책임지고 맡아주었다고 한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김정은 시대에 그를 기리는 소개편집물도 만들어졌다.
3. 참고문헌
- 임수호(2009), 한반도 평화체제 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한국정치연구 18(2).
- 조선대백과사전 8권(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