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23:49:23

룽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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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룽즈민.jpg
룽즈민(상), 옌슈샤(하)
이름 룽즈민(龙治民)
출생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1985년 9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1. 개요2. 생애3. 사건의 발단
3.1. 두장잉, 장산허의 실종3.2. 수색
4. 범행수법5. 판결6. 여담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범죄자. 산시성 상뤄디구 상현[1] 출신이며, 이후 왕졘촌이라는 마을로 이사하여 거주하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아내인 옌슈샤와 함께 1983년에서 1985년을 전후로 2년간 48명을 죽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1985년 9월 27일에 처형되었다.

2. 생애

룽즈민이 6살일 때 그의 어머니는 죽었고 학교를 다닐 시기에 동창들보다 나이는 많았으나 체형이 왜소해서 자주 동창들의 괴롭힘을 받았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룽즈민은 홍위병이 되어 활동을 했으나 마을에서 혁명위원회를 만들어 그의 홍의병 조직을 와해시켰었다. 룽즈민은 공부도 꽤 열심히 했지만 자신의 가난한 상황에 공부는 맞지 않다고 여겨서 포기했으며 항상 홀로 지내고 친구가 없었었다. 1974년 봄, 수해로 인해 왕졘촌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으며 병을 핑계로 계속 농삿일에 나가지 않았다.

결국 먹고 살아야 하니 일을 하긴 했지만 남들이 연간 400 포인트의 작업량을 채울 때 룽즈민은 100 포인트 밖에 채우지 못했다. 1977년 겨울에는 치매에 걸린 여성 한명을 집으로 꾀어 가둬놓고 수시로 강간했으며 치매 여성은 마을 민병에 의해 풀려났다. 1978년에는 중매를 통해 옌슈샤라는 동네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옌슈샤는 흉막염이 있고 하체 장애가 있는 여성이었다. 어쨌든 룽즈민의 집은 계속 가난해져만 갔고 식량배급표를 사다 180여 위안 정도의 빚을 지는 바람에 빚 독촉까지 받았지만 갚지 않았고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로 밤에 돌아다녀서 마을 사람들과의 왕래도 거의 없었다.

3. 사건의 발단

1983년에서 1985년 사이에 마을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타지에서 마을로 일을 하러 오거나 물건을 팔러 온 외판원, 행상인 등의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었는데 1985년 5월까지 공안의 보고에 의하면 최소 37명이 실종되었다.

3.1. 두장잉, 장산허의 실종

1985년 5월 26일 40세 남성인 두장잉은 형인 두장녠을 따라 도시에 가서 돼지를 팔고 콩깻묵을 샀다. 집에 돌아올 때 둘은 서로 흩어져 다른 길로 돌아왔는데 집에 온 두장녠은 동생인 두장잉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들은 두장잉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했고, 다음날인 5월 27일 새벽에 두장녠이 다시 한번 동생을 찾으러 나섰는데 제지공장에서 이종사촌이자 출납원으로 일하는 후이팅을 만났다.

두장녠은 이종사촌인 후이팅에게 두장잉의 실종에 대해 얘기했고 그것을 들은 후이팅은 깜짝 놀라며 안그래도 이틀 전에 한 남성이 자신에게 1.85위안 어치의 가치가 있는 쪽지를 내밀었는데 거기엔 두장잉의 서명이 있었다고 했다. 후이팅은 당시에 그 남자에게 왜 당신이 두장잉의 서명이 담긴 쪽지를 가지고 있냐고 묻자 그 남자는 두장잉이 자신에게 돈을 빌렸고 돈을 이런 쪽지를 통해서 갚겠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 왔다고 했다.

1985년 5월 28일, 후이팅의 증언을 토대로 두장잉의 빚을 독촉하러 온 남자가 44세의 룽즈민인것을 알고 두장녠은 룽즈민을 찾아갔다. 룽즈민은 시치미를 떼며 그와 말싸움을 벌였는데 그때 장인산이라는 사람도 두장녠과 함께 거들었다. 장인산의 동생인 장산허는 일용직 일을 하러 떠났다가 1985년 1월 11일에 실종 되었는데 장인산이 그의 동생을 찾다가 동생 장산허가 실종 전에 룽즈민을 만나서 하루 5각의 수당을 받기 위해 룽즈민네 집으로 일을 하러 갔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룽즈민이 시관 터미널에서 여러 남녀들을 상대로 일을 구해준다는 식으로 데려갔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결국 룽즈민은 파출소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도 계속 시치미를 뗐다. 룽즈민은 경찰에게 두장잉은 자신에게 20위안을 빌린 채 사라졌고 장산허는 증언대로 하루동안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한건 맞지만 일이 끝나고 다음 날에 가버려서 자신은 모른다고 진술했다.

3.2. 수색

공안은 빈털터리 농민인 룽즈민이 무슨 짓을 벌이겠나 싶어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실종자 가족들의 강력한 요구로 1985년 5월 29일에 경찰관 2명을 룽즈민의 집으로 보내 수색을 진행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이상이 없으면 룽즈민을 석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룽즈민의 집은 이상했다. 창문은 흙벽돌로 막혀있고 내부는 뭔가 땅굴마냥 어두컴컴 했으며 목재 계단에는 혈흔 같은 것이 발견 되었다. 마침 룽즈민의 아내 옌슈샤가 집을 보고 있어 공안은 그녀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녀는 질문에 맞지 않는 미심쩍은 말을 횡설수설 하였다. 내용은 "방엔 아무것도 없다", "하루는 집에 여러 사람이 왔는데 내가 자고 있을 동안 밖에선 아무 소리가 안들리고 둘째날에 보니 모두 사라졌어요..", "옷을 빨았더니 물이 빨갛게 변했어요.." 등등이었다.

룽즈민의 집은 본채를 포함해 동쪽과 서쪽에 사랑채가 각각 두 곳 있었다. 서쪽 사랑채에는 빈 술병, 잡초, 잡동사니가 가득했고 동쪽 사랑채는 방치된 지 오래되어 거미줄과 먼지가 얼굴에 가득 달라 붙을 정도였다. 수색 끝에 두 명의 공안은 이상하지만 물증이 될 만한 것들을 찾진 못했고 다시 본부로 돌아가 상부에 보고했으며 그날 오후에 더 많은 공안 인력이 룽즈민의 집 수색에 투입 되었다.

룽즈민의 집에서는 매일 고약한 냄새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얼씬을 안 했는데 수색에 투입된 형사인 왕커우는 그 냄새를 맡고 단번에 시체에서 나는 냄새인 것을 눈치챘다. 왕커우 형사는 방치된 동쪽 사랑채의 지하 쪽에서 발가벗은 채로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놓인 남자의 시신 2구를 발견했다. 공안 측은 즉시 수색을 중단하고 룽즈민의 집을 봉쇄했으며 룽즈민을 체포했다. 또한 룽즈민의 아내 옌슈샤의 도주, 자살 등의 행위를 막기 위해 룽즈민의 소재지인 양위허현, 룽즈민의 본적인 인즈읍, 옌슈샤의 소재지인 진링스읍, 류완읍의 촌 간부, 민병들을 동원하고 소재지의 전과자들을 모두 감시하게 했다. 사건의 발생지인 완졘촌은 경찰 특수부대가 봉쇄했으며 길목마다 실탄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배치 되고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못 떠나게 했다.

앞서 최초로 발견된 두 구의 시체중에 한 구는 두장잉이 확인 되었고 한 구는 장산허가 아닌 신원 미상의 16~17세 정도의 소년이였다. 공안은 세 번째 수색을 시작했을 때, 동쪽 문채에 쌓인 장작더미 뒤에 있던 비료 주머니에서 여성의 시체를 발견했다. 50살 정도는 되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현장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구경했으며 공안과 민병들은 안전띠를 설치해서 접근을 못하게 했다. 공안국장, 상현의 서기 등의 고위 공직자들도 사건 현장을 찾아왔고 경찰견까지 동원해서 수색을 했지만 앞서 발견한 3구의 시체 이후로는 진전이 없었다.

그때 구경 중이던 한 마을 사람이 룽즈민의 집 앞에 무를 보관하는 굴이 있었는데 언제보니 메꿔지고 그 위에 배추를 심었다고 말했다. 룽즈민의 아내인 옌슈샤는 경찰들에게 그 굴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굴은 문 앞에서 1m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한 민병이 그 땅을 팠는데 처음에는 옥수수 알갱이 같은 것이 나왔고 조금 더 파보니 옥수수 잎이 나왔다. 공안은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해 그 곳을 파게 했는데 3m 깊이에 2m 폭의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흙바닥에 덮여 있던 옥수수 잎을 걷어내자 가지런히 있던 8~9구의 시체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공안 측은 땅을 더 파면 1개의 층이 더 나올 것이라 여기고 우선 탐사를 중단하고 상부에 보고를 했다.

보고가 완료되고 부검, 체증을 하는 동시에 수색을 계속하였는데 새벽 7시까지 2개의 층이 발굴되었으며 8~9구의 시체가 추가로 또 발견되어 합이 20명이 되자 왕커우 형사는 땅을 팔 때마다 시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못지 않은 규모라고 생각했다. 5월 31일 동이 틀 무렵, 추가적인 수사를 위해 아래로 향하는 갱도를 파내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에도 시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당일 오전 11시에 1차 수색이 끝났다. 5월 31일까지 발견된 시신은 총 33구. 잠시 휴식을 취하던 도중 오전 11시 30분에 한 공안이 경악을 했고 사람들이 그 곳에 몰려들었다. 공안은 바닥에 손을 집어 넣었을 때 허공이 느껴진 것을 알고 그렇게 1개의 층이 더 발견되었다. 그 곳에선 8구의 시체를 찾아냈다. 그날 오후까지 총 3개 층의 구덩이에 도합 48구의 시체가 발견 되었으며 유족들은 구경꾼 사이에 섞여서 울음을 터트렸다. 시신은 이미 부패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백골화가 된 것과 매장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을 포함해 다양했다. 시신 수습을 하고 부검 후, 유족에게 시신을 인도하고 수색이 끝났다.

4. 범행수법

범행수법은 주로 일을 주겠다면서 사람을 꼬셔서 일을 시키고 하루 자신의 집에서 묵게 했다. 왜소한 룽즈민이 정상적으로 상대를 때려죽일 힘이나 능력은 없었기에 피해자가 깊게 잠들었을 때 둔기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 돈을 갈취하고 시체를 묻는 방식이였다. 시체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벗겼다. 벗긴 옷은 빨아서 자신이 입고 다녔다고 한다. 48구의 시체에서 손목시계, 식량배급표, 현금 등등을 얻었는데 대략 573위안의 가치가 나온다.

5. 판결

공안측은 룽즈민 부부의 범행동기는 돈을 빼앗고 무상노동력을 얻기 위해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법원에서는 사형을 선고했고 룽즈민 부부는 1985년 9월 27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6. 여담

  • 룽즈민의 집에서 최초로 시신이 3구 나왔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 몇명 만이 구경을 하러 왔지만 수십 명의 시신이 매장된 굴이 발견된 이후로는 경찰, 방송사 및 신문사의 기자와 구급대,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포함해 1만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룽즈민의 집 앞 대문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 룽즈민은 조사 당시에 자신은 국가가 못하는 것을 대신하기 위해 살인을 했다고 말했는데 이유는 자신은 3가지 부류의 인원들은 살인하지 않았는데 과학자, 공무원, 노동자 이렇게 세 부류는 죽이지 않았고 룽즈민 자신은 장애인, 허송세월 시간 보내는 백수같은 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 룽즈민 부부에게는 1979년에 낳은 딸이 있는데 같은 동향 출신 사람이였던 장차이어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룽즈민 부부의 딸은 시댁에서 거두었는데 역시 살인마 부부의 딸이라는 딱지 때문에 학교에서 괴롭힘 받고 적응하지 못해서 학업을 포기하고 성을 바꿔서 나중에 신장 자치구 쪽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 공식적인 피해자는 48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 103명이라는 얘기가 있다.
  • 공식적인 피해자는 남자 31명, 여자 17명.
  • 상당히 파장이 큰 사건이라 해외의 BBC 같은 곳에서도 뉴스로 방송되었다.


[1] 현재의 상뤄시 상저우구 양위허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