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18:37:39

룻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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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르요스 성당과 알 카드르 (우마리) 모스크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오스만 제국2.4. 근현대

1. 개요

히브리어 [ruby(לוֹד, ruby=lód)]
아랍어 [ruby(اَلْلُدّْ, ruby=al-ludd)]
영어 Lod / Lydda

이스라엘 중부의 도시. 롯, 로드 등으로도 표기된다. 텔아비브의 동남쪽 외곽에 위치하며, 남쪽의 라믈라와 시가지가 연결된다. 인구는 약 8만명이고, 북쪽에 벤구리온 국제공항이 있다.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고, 기독교에 있어서도 성 게오르기우스가 순교한 곳으로 유명하다.

비록 이슬람 제국 시기 인근 라믈라에 밀려나 쇠퇴했지만 19세기 들어 도시 규모를 회복했고, 현재는 라믈라와 비슷한 규모이다. 20세기 전반까지 주민의 절대 다수는 무슬림 / 기독교도 아랍인이었으나 1차 중동전쟁 후 대부분 추방되었고 유대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라믈라처럼 룻드도 유대인 우위 하에 30% 가량의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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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의 성 게오르기우스 (조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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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시절 성당을 활용한 알 카드르 모스크

청동기 시기부터 도시가 있었고,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에 등장한다. 고대 유대인들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학문과 상업의 도시였다. 당시 지명은 벤자민이었다. 다만 유대 전쟁 시기 로마 제국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유대 색채를 지우려는 의도로 ' 제우스의 도시'란 뜻인 디오폴리스 (Διόσπολις)라 명명되었다. 4세기 기독교 공인 후에는 성 요르요스 (게오르기우스) 성당이 세워졌고, 기독교도 다수 도시가 되었다. 7세기 이슬람 정복 후에는 성당의 일부가 알 카드르 모스크로 분리되었다. 아랍인들은 도시를 룻드라 불렀다.

이슬람 제국 초엽, 룻드는 팔레스타인 주의 치소로 기능했다. 하지만 710년대 술라이만 이븐 압둘말리크가 인근에 신도시 라믈라를 세워 새로운 치소로 삼았고, 룻드는 그 위성도시 격으로 유지되었다. 20세기 초엽 룻드의 주민은 90%의 무슬림과 10%의 기독교도로 구성되었고, 1947년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도 아랍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이듬해 이스라엘 군이 장악하였다. 이후 아랍계 주민 대부분이 추방되었고, 일부만 남아 현재는 30%의 아랍인과 70%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2.1. 고대

청동기 시기부터 팔레스타인 해안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진흙 벽돌 성벽에 이어 석축 성벽이 세워졌다. 주민들은 이집트와 꾸준히 교류하며 그 도기를 모방했다. 롯은 기원전 1465년 투트모스 3세의 가나안 도시 목록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고대 시기 롯은 주요 유대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43년 로마령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롯의 주민들을 노예로 팔기도 했으나 2년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차 유대 전쟁 시기 로마 장군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예루살렘으로 행군하며 주민들이 떠나 있던 롯을 파괴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군은 언약궤 행사를 위해 주민들이 대부분 떠난 상태이던 롯에서 50여 잔존 주민을 학살하고 시가지에 방화했다 한다.

서기 68년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주둔했다. 예루살렘 함락 후에는 랍비 타르폰이 롯의 유대인 공동체를 주도했다. 115-117년의 키토스 전쟁 시기에 로마군은 율리아누스와 팝포스 하의 유대인들을 포위했고, 도중 하누카 기간의 금식을 허용한 랍비 랍반 가마리엘 2세가 사망했다. 로마군은 롯을 함락한 후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을 벌였고, 그후 토라 학습이 금지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 '롯에서의 학살'은 탈무드의 관용구가 되었다. 서기 140년대의 2차 유대 반란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는 롯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유대 색채를 지우기 위해 제우스의 도시란 뜻인 디오폴리스로 명명하였다. 이후로도 도시는 비유대인 주민들이 정착하여 발전했다.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롯을 식민도시로 승격시키며 '콜로니아 루키아 셉티미아 세베라 디오폴리스'라 명명하였다. 3세기 무렵 롯의 주민들읔 대부분 기독교도였고, 아리우스의 친구 아에티우스가 주교를 지내기도 하였다.

2.2. 중세

기독교 공인 후 팔레스타인의 주요 주교구 중 하나가 되었고, 415년 12월에는 펠라기우스를 단죄하기 위한 디오폴리스 공의회가 열렸다. 펠라기우스는 효과적으로 변론했으나, 결국 이듬해 이단으로 몰려 몰락하였다. 6세기 들어 디오폴리스는 기독교 색채를 더하기 위해 3세기 후반 이곳에서 태어난 성 게오르기우스 (조지)를 따서 게오르기오폴리스로 명명되었다. 다만 여전히 롯의 변형인 릿다로 더 통용되었고, 636년 이슬람 정복 후에는 알 룻드라 불리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 시기 룻드는 팔레스타인 주의 치소가 되었고, 이는 710년대 인근의 신도시 라믈라로 옮겨지기까지 계속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술라이만은 라믈라로 롯의 주민들을 이주시켰고, 이로써 롯은 쇠퇴했다. 10세기의 지리가 알 마크디시는 대사원과 접한 멋진 성당을 언급하며, 현지인들은 그 문에서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죽일 것이라 믿는다고 기록하였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도시를 장악하고 생 조르주 드 릿데라 명명하였다.

영국인 십자군에 있어 브리튼 섬의 수호신인 게오르기우스 (조지)의 무덤이 있는 룻드는 중시되었고, 라틴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십자군 시기 룻드에는 10인의 기사와 20인의 보병이 배치되었고, 자체적인 시 위원회가 있었다. 1187년 하틴 전투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가, 1191년 리처드 1세 3차 십자군이 재점령하였다. 1267년 바이바르스가 점령해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고, 14-15세기 카이로와 다마스쿠스를 잇는 바리드 (역참)의 거점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15세기 말의 예루살렘 카디 (법관) 무지르 앗 딘은 활발한 대사원이 있는 활기찬 도시로 묘사했다.

2.3. 오스만 제국

오스만 시기 룻드는 가자 리와 (군) 산하 라믈라 나히야 (면)에 속했고, 1596년 기준 250여 무슬림 가구와 240여 기독교도 가구가 공존했다. 주민들은 각존 곡물과 포도 등의 과실, 시장세 등 1/3의 세율로 연 4만 5천 악체를 납부했다. 16세기 중반부터 룻드의 세수는 휴렘 술탄이 예루살렘에 설립한 하세키 술탄 이마레트의 와크프 (재단) 운영비로 귀속되었다.

19세기 중반 룻드를 방문한 선교사 윌리엄 M. 톰슨은 올리브, 무화과, 석류, 배, 뽕나무, 단풍나무 등이 재배되는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인구 2천의 비옥하고 활기찬 도시라 묘사하였다. 과수원은 라믈라까지 이어져 있었고, 흔히 볼 수 없는 수확량을 자랑했다 한다. 1869년 기준 룻드에는 4850명의 무슬림, 1940명의 정교도, 55인의 가톨릭교도, 5인의 개신교도가 있었다. 이듬해 프랑스의 후원으로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이 재건되었고, 1892년에는 야파-예루살렘 철도의 기차역이 세워졌다.

2.4. 근현대

19세기 후반, 룻드에는 일단의 유대 상인들이 정착했으나 1921년 야파 폭동 후 떠났다. 1922년 룻드의 8천여 주민 중 무슬림이 7천, 기독교도가 1천, 유대인은 11명이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 1931년 1만 1천, 1945년에는 1만 7천에 이르렀다. 2차 대전기 영국 당국은 룻드에 보급 기지를 세웠고, 인근에 (1973년 벤구리온 공항이라 명명될) 비행장도 추가했다. 1945년 룻드에는 1만 5천의 무슬림, 1800여 기독교도, 20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룻드는 아랍 국가에 배정되었지만, 이어진 1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 령이 되었다. (1948년 7월) 점령 다음날 이스라엘 군은 '거리의 모든 동체'에 발포하여 250 ~ 400여 주민이 살해되었다.

당시 룻드에는 5만에 달하는 아랍 피난민이 몰려 있었는데, 이스라엘 정부는 그중 1천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17km 떨어진 서안지구까지 걸어서 떠나게 했다. 그러한 고난의 행군 도중 350여명이 탈진해 사망했고, 이스라엘 군은 시가지를 약탈했다. 남은 아랍 주민들도 기존의 집을 그해 8월부터 아랍 각지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에게 내주어야 했고, 룻드는 유대인 과반 도시가 되었다. 2010년에는 아랍 구역에 3m 높이의 장벽이 둘러졌고, 각종 기반 시설들은 유대 구역에만 설치되었다. 2021년 5월, 룻드에선 아랍계와 유대 주민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시장이 네타냐후 총리에게 통제 불가를 전했다. 이후 내려진 긴급 조치에서 이스라엘 군경은 아랍 군중에만 폭력을 행사하여 진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