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라틴어: Lucius Cornelius Cin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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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버지) 안니아(어머니) 코르넬리아 킨나(누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들 또는 형제) 폼페이아 마그나(아내 또는 며느리/제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손자 또는 조카) |
직업 | 로마 공화정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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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법무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독일의 고전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킨나 지파는 기원전 2세기가 돼서야 역사에 등장한 점을 근거로 본래 코르넬리우스 씨족에 속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흡수된 플레브스 가문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킨나 지파가 파트리키에 속한다고 간주한다.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 역시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27년 킨나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오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일 것이라 추정한다.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항하여 마리우스파를 이끌었으며 기원전 87년부터 84년까지 4번 연속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84년 술라를 토벌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출진했다가 병사들의 반란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어머니 안니아의 기원은 알려진 바 없으며, 킨나가 사망한 후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와 재혼했지만, 피소는 술라의 내전 후 집권한 술라의 압력에 따라 그녀와 이혼했다. 누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 아내였던 코르넬리아 킨나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술라파가 내전에서 승리한 뒤 대숙청을 단행했을 때 숨죽여 지냈다. 그러다가 술라 사후인 기원전 7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에서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했다. 레피두스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패한 뒤 사르디니아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한 후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의 군대에 가담하여 히스파니아로 이동해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벌이고 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했다. 그는 세르토리우스가 조직한 원로원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전쟁 기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73년 세르토리우스가 페르페르나에게 암살되었을 때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가 세르토리우스 암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나중에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되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후 토벌군에 항복한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사면된 뒤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술라의 측근이었던 이들이 지배하는 로마 정부에서 '킨나의 아들'이 정상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기에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후 로마에서 권력을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술라에게 추방당한 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정치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비로소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기원전 44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카이사르의 전 처남이며 카이사르 덕분에 법무관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공화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심지어 암살이 벌어진 날 포로 로마노 연단에 서서 카이사르를 폭군으로 매도하고 카이사르의 인격을 모독했다. 청중은 이에 격분해 욕설을 퍼부었고, 그는 연단을 떠나야 했다. 3월 16일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던 그는 회의가 끝난 뒤 귀가하던 중 카이사르의 퇴역병들에게 공격받았다. 그는 어느 저택으로 피신했다가 병사들이 집을 불지르려 해서 화마에 휩쓸릴 위기에 놓였지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파견한 병사들이 이를 저지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군중은 카이사르의 처참한 모습을 목도하고 몹시 분노해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을 자기들 손으로 처단하려 들었다. 이때 카이사르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폭군이라고 매도한 킨나 역시 공격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군중은 로마 시가지를 돌며 그를 찾다가 시인이자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가이우스 헬비우스 킨나를 그로 오인하여 목을 베어버린 뒤 수급을 창에 꽂아놓고 거리를 행진했다.
기원전 44년 말, 그는 당시 카이사르파를 이끌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속주에 부임하기를 거부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필리피카이에서 그런 그를 칭송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빌헬름 카를 아우구스트 드러만(Wilhelm Karl August Drumann, 1786 ~ 1861)은 기원전 32년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그의 형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기원전 44년 법무관 킨나는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 폼페이아 마그나가 결혼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기원전 44년 법무관 킨나와 기원전 32년 집정관 킨나 중 어느 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폼페이아는 그의 아내일 것이고, 후자라면 며느리 또는 제수일 것이다. 아무튼 폼페이아는 킨나와의 사이에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기원전 1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손녀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를 음해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았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사면되었다. 이후 서기 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