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라틴어: Lucius Minucius Basi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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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아버지) |
참전 |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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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법무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다.2. 생애
기원전 305년 집정관 티투스 미누키우스 아구리누스를 배출한 이래 고위 행정관을 여러 명 배출한 노빌레스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는 이름만 전해질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알 수 없는 시기에 조영관을 역임했고, 나중에 갈리아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Legatus)를 맡아 갈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기원전 53년 에브로네스 족에 대항한 카이사르의 기병대를 이끌었다. 그는 그들을 기습해 격파했지만 그들의 지도자인 암비오릭스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나 숲속 깊숙이 숨어버리는 바람에 잡지 못했다. 기원전 52년 군단을 이끌고 레미족의 땅에서 겨울 동안 숙영했다.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그 해 여름 아드리아 해의 쿠릭타 섬에서 벌어진 쿠릭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 함대에게 포위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구하기 위해 뗏목에 병사들을 실어 보냈다. 적이 킬리키아식 그물을 걸어뒀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조석을 이용하여 뗏목 중 2척이 그물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중 한 척은 근처의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이 배에는 오피테르기움에서 온 1,000명의 갈리아 보조군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종일 저항했으나, 결국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항복을 거부하고 서로를 찔러 죽었다. 결국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기아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보다못해 항복했다.
기원전 48년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해 수비대 일부를 지휘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의 방패는 이 전투를 치르면서 120번의 생채기가 났고, 그의 신체에는 6개의 상처가 낳고 눈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본국으로 이동하여 브룬디시움의 수비를 맡았다. 기원전 48년 11월,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자신을 대신해 그에게 자신의 선처를 호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로부터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법무관으로서 한 지방을 다스릴 권한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지방에 보내지 않았고, 그 대신에 막대한 돈을 수여했다. 카이사르는 아마도 믿을 만한 부하인 그가 해외에 나가기보다는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리가리우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기고 원한을 품었다. 결국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했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을 단행했다.
이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의 정치 투쟁이 벌어졌지만, 그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정치 판도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시세를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피아노스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동료 공모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와 거의 동시에, 즉 기원전 43년 여름에 자신에게 불복종한 노예들을 거세하려 했다가 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