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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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세워진 추모비 |
1. 개요
1982년 10월 20일 소련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압사 사고.2. 사고의 전개
당시 UEFA컵 2라운드 경기의 1차전이 열렸는데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네덜란드에서 온 HFC 하를럼[1]이 경기를 펼쳤다. 당시 축구를 보러 16,500여명의 관중이 모였는데 사고 이전 아스날 FC와의 경기 때는 68,500명이 모였고 당시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최대 82,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적게 모였다. 관중의 거의 대부분이 스파르타크 팬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원정온 팬들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섭씨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 경기 전 눈이 내렸는데 아직 지붕이 설치되기 전이라[2] 직원들은 급히 눈을 치우긴 했지만 동쪽과 서쪽 관중석의 눈만 치웠고 나머지는 그대로 있었다. 12,000명의 관중들은 동쪽 관중석에 앉았는데 동쪽 관중석이 지하철역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오후 7시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시작 후 16분 에드가 게스(Edgar Gess)가 골을 넣었지만 경기는 큰 흐름 없이 조용히 흘러갔고 후반전도 끝날 무렵이 되자 경기가 다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팬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동쪽 관중석에는 양 옆으로 계단이 있었고 출입구도 전부 열려 있었지만 사람들은 지하철 역과 더 가까운 1번 계단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점점 많이 모여들었고 너무 모여들어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1번 계단을 통해 내려가던 여성 1명이 신발이 벗겨지면서 넘어졌다. 이를 본 뒤의 사람들은 여성을 도우려고 멈춰섰으나 이걸 보지 못하고 뒤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또 걸려 넘어지고 걸려 넘어진 사람들에 다른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군중붕괴가 일어났다. 앞에서 사람들이 도미노마냥 계속해서 넘어지는 것도 모른 채 뒤에선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려와 사태는 커지기 시작했다.
후반전 90분, 경기가 끝나기 20초 전에 세르게이 셰브초프(Sergei Shevtsov)가 2번째 결정 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2-0으로 스파르타크의 승리로 끝났지만 승리를 결정지은 골에 나가려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사태는 더더욱 심각해졌다. 훗날 세르게이 셰브초프는 "차라리 그때 골을 넣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이 사고로 66명이 사망했으며 61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 중 21명은 중상이었다. 사망자 중 대다수는 청년이었고 38명은 18세 이하였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고작 14살이었다. 이 사고는 소련 역사상 가장 사람이 많이 사망한 스포츠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이 사고와 관련해 경기장 감독과 매니저, 감독 대리인, 그리고 동쪽 관중석을 책임지던 경찰이 법정에 섰다.감독과 매니저는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소련 성립 60주년 기념일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4. 사망자 수 조작?
하지만 이런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사고 발생 직후에는 언론사에서 그리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의 몇몇 신문사에서 "사상자가 좀 있었다."고 보도되기만 했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쪽 스포츠 잡지에선 "3명 사망, 100여명 부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고로부터 얼마 안 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하면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그쪽으로 더 몰려 묻혔다.그러다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인 1989년 4월 18일 소련의 한 스포츠 잡지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스포츠 참사 중 이 참사를 언급하면서 세상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기사에선 100명 이상 사망했다고 보도되었다. 3달 후 같은 잡지에서 이 참사를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34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7월 20일 소련의 한 신문사에서 이 참사에 대해 다루면서 66명 사망이라고 발표했으며 당시 사고 조사에 참여했던 형사와의 인터뷰도 담았고 왜 이 사고가 그동안 숨겨졌는지도 보도했다.
9월 27일에 34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던 잡지는 "기자의 추측에 불과했다."며 66명이 사망한 것이 맞다고 다시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의 분위기와 사고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나서야 대중에 제대로 알려졌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직까지도 사망자 수가 축소되어 보고됐고 실제론 340명이 사망한 게 맞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일 경우 리마 축구 폭동을 넘어서는 사상 최악의 축구 참사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