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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파일:Desaix.jpg

Louis Charles Antoine Desaix ( 1770년 12월 31일 ~ 1800년 12월 30일) (30세)

1. 개요2. 생애
2.1. 그의 어린 시절과 군인의 길
3. 프랑스 혁명군에서의 드제의 활약상
3.1. 1795년의 라인 전역에서부터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까지3.2. 이집트 원정, 그리고 제2차 이탈리아 전역에서3.3. 목숨과 맞바꾼 승리
4. 영웅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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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으로 루이니콜라 다부와 같은 귀족출신[1] 장군이다.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드 베구(Louis Charles Antoine Desaix de Veygoux)라고 쓰기도 하며, 별명으로는 특이하게 ' 정의의 술탄(Sultan juste)'이 있다.

2. 생애

2.1. 그의 어린 시절과 군인의 길

퓌드돔(Puy-de-Dôme)의 Ayat-sur-Sioule이라는 도시에서, 드제는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럭저럭 보낸 뒤 드제는 프랑스 원수인 데퓌아트(d'Effiat) 장군이 세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드제에게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는데, 학교에 군사교육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곳에서 처음으로 군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드제는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했다.

그가 근위대에서 6년동안 복무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근위대였던 드제는 당연히 체포 대상이 되었고, 주변에서 조언하는 것을 듣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하늘이 드제를 도왔던 건지,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는 것을 거부한 드제에게 샤를 루이 빅토르 드 브로이(Charles Louis Victor de Broglie) 경[2]이 손을 뻗쳤고, 드제는 그의 막하로 들어갔다. 그의 두드러진 활약은 공화국 정부의 호감을 얻었고, 게다가 (공화국 정부가 보기에) 구체제의 인물들과는 달리 새 질서에 적응하고 말을 잘 듣는 드제는 비교적 빨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94년에 사단장의 지위에 올랐다.

3. 프랑스 혁명군에서의 드제의 활약상

3.1. 1795년의 라인 전역에서부터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까지

드제는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했을 당시 주르당 장군의 우익군을 맡아 지휘했다. 그리고 모로 장군의 바이에른 침공 때에 모로 장군이 이끄는 라인 방면군에 종군했다. 여기까진 별다른 활약이 없었지만 이듬해인 1796년에 벌어진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의 전투에서 그는 중요한 지휘를 맡게 되었다.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에서 각각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박살난 모로 장군의 라인군이 후퇴하게 되는데 그 후위를 맡은 것. 이후 케흘 요새까지 무사히 후퇴하자 그에게는 매우 큰 영예가 주어졌는데, 드제가 바로 그의 가문명이 된 것이다.

이듬해인 1797년에 그는 첫 군사적 성공을 거두게 될뻔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좌절되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무언가라도 해보고 싶어서 무작정 이탈리아 원정에 따라갔다. 그 때, 그를 맞아준 젊은 장군은 동년배[3]인 드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드제는 그를 계기로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3.2. 이집트 원정, 그리고 제2차 이탈리아 전역에서

이탈리아 원정에서 나름대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있던 드제는 임시적으로 "Army of England"[4]의 사령관직으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폴레옹에 의해 이집트 원정군에 소속되어 이집트를 향해 출발했다. 그의 사단은 이집트 일대를 주름잡고 있던 맘루크군의 공격을 받았지만(피라미드의 전투) 곧 쳐바르고 별동대를 이끌고 나일 강 상류로 올라가 무라드 베이(Murad Bey)마저 두들겨 팼다. 이 일로 인해 상이집트에 있던 농부들로부터 "정의의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줄 함대가 아부키르에 정박하고 있던 중에, 하필이면 호레이쇼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에게 함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란츠 2세는 "기회다!"를 외치며 이 기회에 잃어버린 땅 좀 찾아보자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국내의 여론마저 그다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지자, 나폴레옹은 일단 급한대로 자신과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일단 프랑스로 빨리 돌아왔다.[5][6]

그 때 나폴레옹은 총재정부를 갈아엎고 집정정부를 세운 뒤 자신이 제1집정에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드제는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마침 거의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던 오스트리아가 근성으로 다시 일어나 북이탈리아를 빼앗으려 들자 나폴레옹은 건방진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밟아주기 위해 1800년에 제네바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5월에 군대를 출발시키게 되는데 드제도 나폴레옹 휘하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즉시 두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군단을 지휘하여 제노바를 제압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드제는 행군 중 리발타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었는데, 마침 나폴레옹의 참모장교가 지나가던 길이라 그를 불러 정황을 알아본 뒤, 곧바로 부대를 재편, 드제 스스로 분견대를 조직하여 부대와 함께 빠른 길로 해서 마렝고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마지막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3.3. 목숨과 맞바꾼 승리

오후 3시경 나폴레옹의 군대는 마렝고 전투에서 완전히 오스트리아군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패주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한 무리의 프랑스 군대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 바로 드제였다. 드제는 바로 전령을 보내 지금 자기 부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보냈다. 드제가 도착하자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귀관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드제는
"이 전투는 명백한 패배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차례입니다."
이라 대답했다.[7] 그 말을 한 후 마르몽이 지휘하는 포병대의 포격과 함께 휘하 3개 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으로 돌격해, 오스트리아군을 혼란에 몰아넣고 패주시켰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에 적의 총알에 맞아 전사했다.[8]

4. 영웅의 죽음

드제가 마렝고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의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루이니콜라 다부에게도 전해졌다.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슬퍼했을 거라 추측한다.

나폴레옹은 그의 친구인 드제를 위한 기념비를 파리의 도팽 광장과 빅투아르 광장[9]에 각각 하나씩 세웠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 놓일 조각들을 당대의 장인 장 기욤 모아트에게 명령하여 만들게 했고, 드제의 무덤은 생베르나르 호스피스에 마련했다고 한다. 원래는 밀라노에 묻혀 있었으나 1805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렇게 두드러지게 활약한 내용은 없었지만, 마렝고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나폴레옹군을 구하기 위해 신속히 달려와 무지막지한 돌격을 성공시켜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그가 세운 군사적 업적이다.

이집트나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베르티에, 란, 다부 등이 원수에 오른 것을 보면 만약 드제가 살았다면 원수봉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 이는 마치 " 삼국지에서의 촉한 방통이 살아있었으면"과 같은 떡밥으로 현재까지 많은 역덕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특히 다부가 원수가 된 것은 그의 상관이었던 드제의 영웅적인 최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1] 다만 몰락귀족 출신이다. [2] 이 사람은 자코뱅파였다. [3] 솔직히 말하자면 드제가 한 살 위다. [4] 영국군이 아니라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은 나폴레옹이었는데, 병력은 5만 명에 달했고 서류상으로는 함대도 제법 그럴싸했으며, 나폴레옹의 주도로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을 이용한 전략구상도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해군의 실상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의 성공으로 주목받던 나폴레옹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던 총재 정부의 의도도 작용한 정략적인 작전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영국 원정을 위해 조직했던 참모집단과 정예부대를 이집트 원정군으로 전환시킨다. [5] 이때 드제도 수행원 중 한명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제1집정이 되고서 한달이 지난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6] 하지만 아직 남겨진 1만 5천여명의 프랑스군은 어찌 빼낼 방도가 없었다. 나중에 드제에게서 클레베르에게 지휘권이 넘어가자, 클레베르가 영국 함대의 장교인 시드니 스미스와 엘 아리쉬의 테이블에 앉아 어찌어찌 교섭을 시도했지만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자 클레베르는 할 수 없이 오스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6:1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헬리오폴리스에서 오스만 군대를 패퇴시킨 뒤 다시 카이로를 재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하고, 이듬해인 1801년에 오스만 군대에 항복한 뒤에야 프랑스군은 귀환할 수 있었다. [7] 이 때 드제는 매우 흥분한 나머지 위의 대사를 외치듯이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8]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클레베르가 카이로에서 암살당한 날이었다. [9] 이쪽에 있던 기념비는 나중에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