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루이 브라유[1] Louis Brai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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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9년 1월 4일 |
프랑스 제1제국 쿠브레 | |
사망 | 1852년 1월 16일 (향년 43세) |
프랑스 제2공화국 파리 | |
직업 | 특수교사, 발명가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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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erhaps the most enduring honor to the memory of Louis Braille is the half-conscious honor we pay him by applying his name to the script he invented – and, in this country, adapting the pronunciation of his name to our own language. We honor Braille when we speak of braille. His memory has in this way a security greater than that of the memories of many men more famous in their day. (T.S.Elliot)
아마도 루이 브라유에 대한 기억들 중 가장 오래된 명예는 우리가 그가 발명한 문자 체계에다가 그의 이름을 붙여 줌으로서 표하는 반의식적인 명예와 이 나라(잉글랜드)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발음을 그대로 가지고 와 발음한다는 점일 것이다.[2] 우리는 점자(braille)에 대해 말할 때마다 브라유(Braille)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의 기억은 당대에 유명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보다 더 오래 갈 것이다.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프랑스의
특수교사이자 현대 점자의 발명자.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점자를 만들어 낸 위인으로서 현대식
점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인 브라이유(Braille)가 점자를 뜻하는 명사로 굳어졌을 정도다.아마도 루이 브라유에 대한 기억들 중 가장 오래된 명예는 우리가 그가 발명한 문자 체계에다가 그의 이름을 붙여 줌으로서 표하는 반의식적인 명예와 이 나라(잉글랜드)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발음을 그대로 가지고 와 발음한다는 점일 것이다.[2] 우리는 점자(braille)에 대해 말할 때마다 브라유(Braille)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의 기억은 당대에 유명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보다 더 오래 갈 것이다.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2. 생애
프랑스 남부 꾸브레이의 마구장인 시몬 브라이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 브라이는 본래는 평범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루이는 3살때 몰래 아버지의 공방에서 송곳을 가지고 놀다가 부러진 파편이 눈에 튀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이후 감염으로 오른쪽 눈까지 멀게 되면서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이 되고 만다.시각장애인이 된 이후 루이의 장래를 걱정한 루이의 부모님은 여러 물건들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는 이후 루이가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루이가 10살에 접어들 무렵 꾸브레이에 파뤼신부가 새로 취임해왔는데, 지역민들과 가깝게 지내고자했던 파뤼 신부는 마을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던 중 루이의 사정을 알게 되고, 루이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파뤼신부는 루이에게 여러 지식을 가르쳤지만, 곧 전문 교사가 아닌 자신으로서는 루이를 가르치는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되었고, 결국 직접 지역의 학교교사를 찾아가 루이를 입학시켜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처음에는 맹인에 대한 교육에 자신이 없었던 교사가 이를 거절했지만 파뤼신부는 계속 교사를 설득했고, 루이는 결국 시각장애인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루이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봤을때에도 월등하게 지적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교과서를 볼 수 없는 문제를 수업 내용을 달달 외워버리는 방식으로 극복하곤 했다. 이런 루이의 뛰어난 능력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파뤼신부는 왕립맹아학교에 루이를 입학시키기위해 직접 후작에게 편지를 쓰고 방문해서 설득하는 노력을 하여 루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왕립 맹아학교에 입학한 루이는 그곳에서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지만 곧 단순히 글자를 돋을새김 방식으로 쓰는 방식으로만 만들어진 책들의 비효율성에 문제의식을 느끼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군대에서 야간문자를 개발한 샤를 바르비에 대위가 왕립맹아학교를 찾아오면서 루이는 직접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3]
바르비에 대위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해 약 3년간 학교를 다니며 문자개발에 전념한 루이는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점자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4] 루이가 완성한 점자는 곧 루이가 다니던 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게 되었고, 이 소식은 그대로 왕립맹아학교 교장인 피녜 박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피녜박사는 루이의 점자시연을 보고는 그 가능성을 파악하고 점자책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후원을 새롭게 받으려 노력을 했지만 이 시도는 루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달성되지 못한다.[5]
졸업 후 루이는 교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낮은 임금이었지만, 왕립 맹아학교의 교사직을 수락하게 된다. 비록 임금은 낮았지만 맹아학교 교사직은 상당한 자유시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루이는 점자의 개발 및 보급에 더욱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6] 그러나 점자를 퍼뜨리려는 노력 도중 당시 기준으로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에 걸린 루이는 결국 잠시 교정을 떠나 고향에서 요양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직접 <맹인들이 만들어 맹인들이 사용하게 될, 점을 이용하여 글자, 음악, 단선율 노래 곡을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수많은 출판사들로부터 출판이 거절되었고, 결국 루이는 한동안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루이의 점자보급활동을 지지하던 피녜 박사가 교장직에서 은퇴하고, 새로운 교장으로 뒤포라는 인물이 부임하게 된다. 뒤포 교장은 피녜 박사와는 달리 점자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점자사용을 금지하거나,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놨던 점자책들을 불태우는 등 루이의 점자보급활동을 방해하였다.[7]
그러나 이러한 점자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암암리에 점자사용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루이의 점자보급을 지원하던 유일한 동료교사인 조셉 고데가 직접 나서서 교장과 담판을 지으면서 이 점자탄압은 끝을 맺게된다.[8]
뒤포 교장이 점자사용을 다시 용인한 이후 왕립맹아학교는 새롭게 지은 건물로 이사를 하게되었는데, 루이는 뒤포 교장의 지원을 받아 개관식에서 점자를 발표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루이는 사람들에게 점자의 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서 점자를 만들고 읽을 학생 두명을 선정하는 준비를 하였다. 개관식 발표날 뒤포 교장은 직접 앞에서 책을 읽은 후 이를 한명의 학생이 순식간에 점자로 만든 후 다른 한 학생이 한글자도 틀리지않게 이를 읽어내는 시연회를 연다. 처음 관중들은 이것이 사전에 준비한 사기극에 불과하다며 비난했지만, 곧 뒤포 교장은 재치있게 무작위로 뽑은 관중이 책을 무작위로 뽑은 후 읽게하여 똑같은 결과를 도출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관중들의 비난을 잠재우게 된다. 이 성공적인 발표는 점자가 세간에 널리 퍼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를 기점으로 점자는 서서히 수많은 맹아교육기관들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발표 이후 이미 결핵에 걸려있던 루이의 건강은 시시각각 악화되었고, 결국 점자의 더 나아간 개량과 보급활동에는 더 나서기 어려워지게된다. 루이는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편지를 통해서만 전세계의 맹아교육자와 맹인들에게 점자 사용법을 전달하였고, 다른 점자보급활동은 루이의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루이 사후 점자 알파벳은 1868년에 맹인들을 위한 공식 문자로 인정됨에따라 유럽전역의 맹인학교에 널리 보급되게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점자교육을 전문으로하는 맹인교육기관도 등장하게 된다. 이후 루이는 사망 100주기인 1952년에 위인들만 모셔진다는 프랑스의 국립묘지 팡테옹으로 시신이 이장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1]
서적이나 문헌에 따라 '브라이유'라고 칭하기도 한다.
[2]
영미권에서는 보통 영어식으로 '브레일'이라고 부르지만 원어와 비슷하게 '브라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걸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
샤를 바르비에 대위가 개발한 야간문자는 어디까지나 군인들이 야간에 간단한 명령을 소통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짧은 메세지를 담는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책의 문장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4]
누군가가 자신이 만든 야간문자를 바탕으로 문자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르비에 대위가 루이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바르비에 대위는 10대 중반에 불과한 루이가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대로 루이를 무시한 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5]
당시 학교를 지원하던 이들은 피녜 박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점자의 가능성이나 맹인들의 보다 폭넓은 수준의 교육에 회의적인 의견을 많이 내비쳤다고 한다. 심지어 돋울새김문자책을 대량으로 후원했던 한 부호는 돋울새김문자가 아닌 새로운 문자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괘씸하다며 후원을 끊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른 맹인학교들의 경우 점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육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하면서 점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6]
다만 교사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루이는 취미를 살려 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부업을 뛰기도 했다.
[7]
이러한 뒤포 교장의 점자탄압은 교장 이외에도 점자와 관련해서 새로운 교육방법을 익혀야한다는 사실에 귀찮음을 느낀 다른 교사들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이들 교사들은 점자보급이 루이같은 맹인 교사를 늘리고 결과적으로 이후에는 자신들의 직업 자체를 없애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8]
당시 뒤포 교장은 점자탄압활동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점자사용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지쳐있었다. 고데는 교장에게 어차피 점자사용은 교장이 이런식으로 탄압을 한들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으며, 차라리 아예 점자사용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보급한다면 최초의 점자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교육자로서 교장의 이름이 역사에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 설득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이후 뒤포 교장은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점자 보급활동을 지원하는 지원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