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의 프랑스 대표팀. 뒷줄 오른쪽 2번째가 루이 가브리야르게이다 | |
이름 |
루이 가브리야르게 Louis Gabrillargues |
출생 | 1914년 6월 16일 |
몽펠리에 | |
사망 | 1994년 11월 30일 (향년 80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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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하프 백 |
신체조건 | 177cm |
등번호 | -[1] |
소속팀 |
FC 세트 (1933-1937) 엑셀시오르 루베 (1937-1938) FC 소쇼몽벨리아르 (1938-1939) SR 콜마르 (1939-1940) 님 올랭피크 (1940-1943) ÉF 몽펠리에-랑게도크 (1943-1944) 님 올랭피크 (1944-1946) |
감독 |
님 올랭피크 (1942-1946) AAJ 블루아 (1956-1963) 앙탕테 몽소 (1968-1969) |
국가대표 | 9경기 0골 ( 프랑스 / 1934-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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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인.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루이 가브리야르게는 몽펠리에 출신으로 1931년,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팀을 이끌고 국가 축구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가브리야르게의 팀 선택은 FC 세트였는데 FC 세트는 데뷔 시즌에 더블을 차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세트는 가브리야르게의 기량을 인정하고 그를 중용했지만 가브리야르게와 세트의 동행은 1936-37 시즌으로 끝났고, 그는 여러 팀을 옮겨다녔다. 그는 1940년 님 올랭피크에 도착하고 나서야 1943-44 시즌을 제외하면 팀을 더 이상 옮기지 않았다. 가브리야르게가 1942년부터 님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는 동안 1944-45 시즌에는 님이 디비지옹 2로 강등당하기도 했다. 그는 127회와 9골의 디비지옹 1, 43회와 3골의 디비지옹 2 기록을 남겼다.
2.1.2. 국가대표
세트의 더블 이후 프랑스 대표팀은 만 19세의 가브리야르게를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 멤버로 선발했다. 하지만 그는 본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팀은 오스트리아에 패했다.가브리야르게의 대표팀 데뷔는 1934년 12월, 유고슬라비아전에서 이뤄졌으며 프랑스는 3대2로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37년 1월의 오스트리아전이었으며 가브리야르게는 총 9경기의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2.2. 감독
1942년부터 님 올랭피크의 선수 겸 감독이 된 가브리야르게는 1946년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님의 감독직을 맡았다. 님의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잠시 라로셸이라는 아마추어 클럽의 감독을 맡았지만 님과의 연봉으로 인한 법적인 분쟁으로 금방 그만 두었다.그 이후 그는 1956년부터 1963년까지 AAJ 블루아(AAJ Blois)의 감독을 맡았고 1968-69 시즌에는 앙탕테 몽소(Entente Montceau)를 지휘했다.
3. 뒷이야기
- 그는 프랑스 최초의 귀화 축구 스타인 라르비 벤바렉과 생년월일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