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마크 부커[1] Lloyd Mark Bu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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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년 9월 1일 |
미국 아이다호주 포커텔로 | |
사망 | 2004년 1월 28일 (향년 7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최종 계급 | 미국 해군 대령 |
복무 기간 | 1953~1973 |
학력 | 네브래스카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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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함장이였다.2. 생애
아이다호주 포커텔로 출신으로 어머니가 3세때 암으로 사망했으며 고아원에 있다가 새엄마밑에 입양되어 성장했다. 어린시절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을 했던 스포츠인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2차 대전에 참전하려했으나 나이로 인해 불합격했다.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 노동자, 바텐더로 일하다가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미식축구 전액 장학전형으로 입학했다. 그러면서 해군 ROTC에 입단했고 졸업 후 군인의 길을 택하며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시절부터 잠수함에서 복무했으며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원거리 정찰, 정보수집활동을 했다. 1961년부터 64년까지 핵잠수함 USS 론킬의 함장이 되었다. 하지만 핵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했고 임명취소가 될예정이였다. 이후 하이먼 리코버 제독에 의해 중용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1965년부터 잠수함이 아닌 지상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정보수집을 진행하다가 북한 해군의 초계함에 둘러싸여 나포당했다. 나포당하는 과정에서 승조원 한 명이 총격에 사망했다. 나포이후 평양으로 이송되어 억류당하며 전기 고문과 여러 심문을 당했다.
이후 북한과 미국은 억류된 승조원의 석방을 놓고 오랜 시간 협상을 벌였다. 북한은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영해 침범은 없었으며 문서에 서명을 한다면 승조원 인수에 관한 문서에만 서명을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오랜 시간 지지부진한 협상 끝에 양측이 기묘한 합의를 이뤄냈는데 북한의 주장대로 문서에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대신, 미국은 서명전에 이 문서에 서명하는 이유는 오로지 '승조원 석방' 때문이어서 미국은 영해 침범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를 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낭독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 대표인 길버트 우드워드 미 육군 소장이 미국의 반박 성명을 낭독한 후 문서 서명을 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석방 후 영해침범 의혹과 범죄 자백서 서명 등의 여러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하지만 피랍 당시 상황은 어쩔 수 없었고 정보수집함의 특성 상 절대로 국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다는 점 등 기타 상황을 고려해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퍼플 하트와 포로 기장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어떻게든 인질을 송환받으려 했으니, 부커 중령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이후 해군 경력을 이어나가다가 1973년 대령으로 예편했고 예편 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며 자서전을 집필했으며 1982년 방한한 기록도 있다. 2004년에 사망했다.
3. 여담
- 자서전에서 억류당하는 동안 식사를 단무지로만 했기때문에 무만 보면 질색한다고 밝혔다.
[1]
일반적으로 버처라고 발음하고 있으나 본인이 언급한 실제 발음은 부커이다. 발음기호 Boo-ker. 본인이 쓴 자서전 정식 번역판에서 부커라 표기하고 있으며 방한 당시의 기사를 쓴 중앙일보에서도 부커라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