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렝가
1. 장문
포악한 기질의
렝가는
바스타야 종족으로, 난폭하고 사나운 생명체를 추적하고 처치하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전리품 수집가다. 그는 강하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온 세상을 샅샅이 뒤진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찾고자 하는 사냥감은 그의 한쪽 눈을 앗아간 공허의 약탈자 카직스다. 렝가가 사냥을 하는 이유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도, 영광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그는 사냥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오늘도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렝가는 바스타야 중에서도 슈리마의 킬라쉬 부족 출신이다. 킬라쉬는 사냥을 숭배하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사냥꾼들은 부족 내에서 큰 영예를 누렸다. 렝가는 킬라쉬의 부족장 폰자프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형제들 중 가장 약하고 몸집이 작았다. 눈에 띌 만큼 왜소한 렝가가 사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폰자프는 렝가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결국 어린 렝가는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수치심에 부족을 떠났다. 몇 주 동안 애벌레와 풀만 먹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어느 날, 렝가는 전설적인 사냥꾼 마콘과 마주쳤다. 인간인 마콘은 즉시 렝가를 해치우려다가 기묘한 생명체의 초라한 행색에 안쓰러움을 느껴 칼을 거두었다. 굶주리고 연약한 바스타야에게 굳이 마콘의 칼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렝가는 수개월 동안 마콘을 따라다니며 그가 사냥하고 남긴 시체로 배를 채웠다. 렝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부족이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마콘이 사냥하는 모습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마콘은 한심한 킬라쉬가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찮아졌다. 그는 렝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는 사냥꾼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냥을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콘은 렝가에게 칼을 던져 준 뒤 그를 발로 차 협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곳에서 렝가는 생존을 위해 생애 최초의 사냥을 시작했다. 렝가는 끝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수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계속했다. 그는 가장 강하고 난폭한 먹잇감을 찾기 위해 슈리마를 샅샅이 뒤졌다. 렝가는 자신의 몸이 다른 킬라쉬들만큼 커질 수는 없겠지만 그들보다 두 배는 더 사나운 사냥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냥에서 상처를 입는 횟수가 적어졌고, 전리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렝가는 사냥한 모래매의 두개골을 닦아 윤을 내기도 하고, 자신이 죽인 비명괴물의 이빨로 머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렝가는 이제는 진정한 사냥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부족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폰자프는 렝가와 그의 전리품을 비웃었다. 그러고는 악명 높은 공허의 생명체인 카직스의 목을 가지고 돌아와야만 렝가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부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마음이 너무 앞섰던 렝가는 교활한 괴물이 먼저 공격을 하도록 틈을 주고 말았다. 공허의 생명체는 렝가의 한쪽 눈을 앗아갔다. 분노와 패배감에 사로잡힌 렝가는 폰자프를 찾아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예상했던 대로 폰자프는 렝가를 호되게 꾸짖었다. 폰자프의 꾸지람을 듣고 있던 렝가는 문득 아버지의 막사를 장식하고 있는 전리품들이 모두 낡고 오래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족의 추장인 폰자프는 아주 오랫동안 사냥에서 손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렝가에게 카직스를 추적하도록 명령한 것도 직접 그 괴물을 사냥하기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렝가는 아버지의 말을 중간에 끊고 비겁하다고 소리쳤다. 킬라쉬족 대부분은 강건한 몸을 타고났고 안락한 집에서 생활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렝가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직면했다. 사냥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고, 열심히 모은 전리품과 사냥 중에 생긴 상처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사냥꾼이 됐음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눈의 상처 또한 그의 전리품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약점을 안고 태어났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렝가의 의지를 증명해주는 진정한 전리품이었다. 렝가는 단숨에 늙은 부족장을 제압했다. 킬라쉬족의 용맹한 사냥꾼들이 렝가에게 불꽃장미 왕관을 씌워주며 렝가를 그들의 새로운 족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렝가는 이제 더 이상 부족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냥감을 추격할 때 솟구치는 아드레날린뿐이었다. 렝가는 폰자프에게서 어떠한 전리품도 수집하지 않았다.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냥감이었기 때문이다. 렝가는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려 했던 공허의 생명체를 찾아 반드시 처치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마을을 떠났다. 킬라쉬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의 만족을 위해. |
2. 먹잇감
렝가는 피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인간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시체는 여섯 개 남짓으로 보였지만 처참한 상태라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려웠다. 무뎌진 포크나 나이프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의 칼들이 초원에 널려 있었다. 렝가는 꿇어앉아 땅에 묻은 피를 핥았다. 혀에 닿은 차가운 피. 달콤하지만 씁쓸한 쇠 맛이 함께 느껴진다. 피를 흘린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았다. 렝가는 시체의 팔 하나를 잡고 뒤집어 보았다. 상처 부분에 끈적끈적한 초록색 타액이 묻어 있었다. 코로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타액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마치 배설물이 잔뜩 고인 웅덩이에서 썩고 있는 시체 냄새 같았다. 코에 잠깐 갖다 댔을 뿐인데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다행히 렝가는 비위가 강한 편이었다. 렝가는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힌 생명체를 추적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렝가는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칼날가죽괴물을 지켜봤다. 괴물은 시체를 발톱으로 집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기대했던 것보다 맛이 덜해 실망한 듯 크게 포효했다. 다리가 네 개인 거대한 칼날가죽괴물은 옆에 있는 텐트를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괴물이 쿵 소리를 내며 한 발을 텐트 위에 내려놓자 텐트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괴물은 텐트를 물어뜯어 갈가리 찢어 버렸다. 노인의 침낭을 내던진 괴물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어린 아이의 비명 소리가 렝가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리고 싱싱한 먹잇감. 겁먹었나 보군. 공포를 느끼겠지. 아주 맛있겠어. 이제 식사를 할 시간이다. 비명을 잠재울 시간. 앗— 통증이 느껴진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다. 날카롭고 뜨거운 통증. 뭔가에 물린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의 통증이 느껴진다.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무기를 가진 무언가가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아무래도 맛있는 먹잇감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온 것 같다. 칼날가죽괴물이 렝가를 물리치기 위해 거칠게 날뛰자 렝가는 한쪽 손에 키라이 도검을 꼭 쥐었다.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괴물의 딱딱하고 질긴 가죽을 쉬지 않고 찔러댔다. 이런 식으로 괴물을 죽일 수 없을 거라는 건 렝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괴물이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있었다. 괴물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잘하면 공포를 느끼게 할 수도 있었다. 칼날가죽괴물은 바닥에 엎드린 다음 몸을 돌려 렝가를 잡고 쓰러뜨렸다. 굉장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렝가는 육중한 몸집의 괴물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괴물이 어찌나 재빠르게 움직였는지 괴물의 몸에 꽂은 칼날을 뽑을 겨를도, 몸을 피할 틈도 없었다. 렝가와 괴물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칼날가죽괴물의 몸을 덮고 있는 날카로운 가시비늘 위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괴물의 비늘 하나하나는 뼈마저 단숨에 베어낼 듯 날카로웠다. 괴물의 몸에 솟은 수천 개의 비늘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괴물을 보호해주는 튼튼한 방패이자 훌륭한 무기였다. 괴물은 킁킁 냄새를 맡으며 렝가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렝가는 일대일로 맞서서는 결코 이 괴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괴물은 몸집이 거대했고, 굉장히 빨랐으며, 아주 강했다. 일생 동안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스스로 사냥을 배운 렝가는 사냥의 비법을 터득했다. 강인하다고 해서 언제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물러설 때와 공격할 때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지금은? 물러설 때였다. 렝가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높게 자란 수풀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칼날가죽괴물도 렝가를 뒤쫓기 위해 높이 뛰어올랐다. 렝가의 등 뒤로 쿵쿵거리는 괴물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빨리 수풀에 도착하면 몸을 숨길 수 있겠지만 조금만 늦으면 칼날가죽괴물에게 붙잡히고 말 터였다. 몇 초만 더 주어지면 수풀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외눈박이 바스타야는 분명 맛이 아주 좋을 것이다. 어리고 싱싱한 먹잇감보다 더 맛있는 건 단 하나, 감히 날 죽이려 하는 먹잇감이다. 먹기 전에 저 고양이 같은 짐승을 밟아서 죽여버릴까? 아니. 산 채로 삼켜버리는 편이 좋겠다. 고통스러운 발버둥이 잦아들다가 마침내 멈추는 것을 느끼며 맛있게 먹어주지. 엇, 발을 헛디딘 듯 하다. 넘어진다. 뭐지? 무기처럼 보이는 뭔가가 있다. 돌뭉치 세 개를 엮은 가죽끈 같은 것이 다리에 얽혀 있다. 이런. 그대로 멈춘다. 올가미에서 다리를 뺀다. 그런데 고양이 같은 짐승이 사라졌다. 높게 자란 수풀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어디로 갔는지 짐작이 간다. 수풀을 향해 껑충 뛴다. 고양이 같은 짐승, 작고 겁이 많다. 나, 크고 빠르다. 원한다면 저 수풀을 모두 짓밟아 주지. 통증이 느껴진다. 뒷다리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 어디지? 뒤쪽? 고양이 같은 짐승이 안 보인다. 다시 도망갔다. 통증이 느껴진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성가시지만 문제될 건 없다. 조금 성가실 뿐이다. 달리기 시작한다. 어떤 방향이든 상관없다. 일단 저 놈과 거리를 벌려야겠다. 침착하자. 뒤를 돌아본다. 바스타야 놈이 어디로 간 거지? 도망갔겠지. 숨어있을지도, 아니면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렝가가 바라던 바였다. 렝가는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의 먹잇감은 신중하긴 했지만 똑똑하지는 못했다. 좀 더 현명했더라면 두려움을 느낄 줄도 알았으리라. 공격을 개시하기 전 잠시 적막이 흘렀다. 렝가의 먹잇감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곧 깨닫게 될 터였다. 머지않아 고통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피가 솟구치면 아드레날린과 기쁨을 만끽하리라. 렝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포효했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다. 분노의 포효가 아니다. 공포의 포효도 아니다. 흥분의 포효다. 소리가 가까워 온다. 이건 분명 실수였다. 이렇게 사방이 뚫린 장소로 오다니. 뛰자, 다시 돌아가자. 숨을 쉴 수가 없다. 왜지? 옆구리에 난 상처 때문이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건가? 목구멍이 젖어 온다. 목이 조여 온다. 비릿한 피.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마을이 어느 쪽이더라? 이쪽인가? 아니, 저쪽이다. 바스타야는 여전히 으르렁거린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달리자. 어디든지 상관없다. 일단 달려야 한다. 금속의 번쩍임. 배 위로 찬 공기가 느껴진다. 아니, 배 안에서 느껴진다. 통증을 느낀다. 쏘인 듯한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 느껴진다. 서 있을 수가 없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힘겹게 숨을 쉬어 본다. 발자국 소리가 더 가까워 온다. 칼집에서 칼을 빼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끔찍한 기분. 배고픔도, 분노도, 기쁨도 아니다. 난생처음 두려움을 느낀다. 렝가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칼날가죽괴물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칼에 크게 베인 배에서 피가 나오는 동안 녀석은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계속했다. 괴물의 동공이 확대됐다. 무엇을 전리품으로 삼아야 할까? 두개골? 갈기? 괴물은 화가 나서인지 혼란스러워서인지 머리를 들어 입을 벌리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렝가는 씩 웃었다. 괴물의 뼈이빨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뼈이빨 목걸이에 저 괴물의 이빨 하나를 추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