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오나르트 프란치셰크 피옹테크 (Leonard Franciszek Piątek) |
생년월일 | 1913년 10월 3일 |
사망년월일 | 1967년 7월 1일 (향년 53세) |
국적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출신지 | 독일 제국 쾨니히스휘테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신체 | 176cm | 73kg |
소속 구단 | AKS 호주프 (?-1947) |
국가대표 | 17경기 11골 (1936-1939) |
감독 | 포곤 카토비체 (1948-1949) |
가족 | 아들 제프 피온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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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피옹테크는 고향 호주프(Chorzów)[2]를 연고로 하는 ASK 호주프에 1926년에 입단했고 정확한 1군팀 데뷔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피옹테크는 1937년, 팀이 엑스트라클라사 준우승을 거둘 때 팀 내 최다 득점자였으나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팀의 상황이 급변했다. 피옹테크는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 독일 국적 목록(Volksliste)에 사인했고 팀은 게르마니아 쾨니히슈테(Germania Königshütte)로 이름이 바뀐 채 가우리가에 편입되었다. 게르마니아는 가우리가 오버슐레지엔에선 강자의 면모를 보였지만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선 단 한번도 1회전을 통과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게르마니아는 원래 이름인 호주프로 다시 이름을 바꿨고 피옹테크는 1947년까지 선수로 뛰었다.
2.1.2. 국가대표
피옹테크는 1936년 9월 13일, 독일을 상대로 처음 폴란드의 하얀 유니폼을 입었다. 이 시합에서 양팀은 1대1로 비겼고 피옹테크는 그의 다음 대표팀 시합인 1937년 6월 23일의 스웨덴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피옹테크는 1938년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지역예선전부터 출전했고 2골을 넣어 4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폴란드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폴란드의 역사적인 월드컵 1라운드 첫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피옹테크는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출전했고 폴란드는 브라질과 역사적인 명승부를 치렀지만 연장 혈투 끝에 5대6으로 아깝게 패했다.
1939년 8월 27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열리기 직전의 헝가리전이 피옹테크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고 폴란드는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의 해트 트릭과 피옹테크의 페널티 킥골을 묶어 4대2로 승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하드워커 스타일의 포워드.4. 수상
4.1. 클럽[3]
- 엑스트라클라사 준우승 1회: 1937
- 가우리가 오버슐레지엔 우승 3회: 1942, 1943, 1944
5. 여담
- 원래 이름은 독일식으로 레오나르트 프란츠 피온테크(Leonard Franz Piontek)였다. 피옹테크는 1937년 봄에 폴란드식으로 개명한 이름이다.
- 아들 제프 피온테크[4]는 80년대 유럽 축구계를 풍미했던 데니시 다이너마이트의 감독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