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1 07:46:01

라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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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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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22대 국왕
Ratchis | 라치스
제호 한국어 라치스
라틴어 Ratchis
생몰 년도 미상 ~ 757년 이후
재위 기간 744년 ~ 749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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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22대 국왕.

2. 행적

파일:라치스 제단.jpg
아버지 페모를 추모하기 위해 봉헌된 치비달레의 라치스 제단.

프리올리 공작 페모의 아들이자 리우프란트 왕의 조카로, 아버지가 리우프란트 왕에게 축출된 뒤 야인으로 지내다가 737년 프리올리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파울 부제는 공작 임명식에 참석한 형 아이스툴프가 리우프란트를 암살할 음모를 세웠지만 라치스가 막았다고 한다. 그렇게 공작에 임명된 뒤, 슬라브인들의 침략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파울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 창이 부러지자 몽둥이를 집어들어 자신을 상대한 슬라브인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744년 8월 리우프란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힐데프란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을 리우프란트 왕의 진정한 상속자이자 정책을 이어받을 계승자라고 내세웠다. 또한 왕실과 공작에 해를 끼치는 불복종과 간첩 행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판사를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일련의 법을 제정해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라틴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라틴 여인 타시아와 결혼했고, 전통적인 랑고바르드 의식이 아닌 로마 의식에 따라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746년부터 랑고바르드 왕의 칭호 대신 '프린켑스' 칭호를 내세웠다.

파일:자카리아 교황을 맞이하는 라치스.jpg
페루자 공방전 중 자카리아 교황을 맞이하는 라치스.

그러나 이같은 친로마 정책에 많은 랑고바르드 귀족들이 반감을 품었고, 왕이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평화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749년 펜타폴리스를 침공하고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를 연결하는 도로의 요충지인 페루자를 포위했다. 이때 교황 자카리아가 포위를 풀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파비아로 철수했다.

749년 7월, 밀라노에 모인 랑고바르드 공작들은 라치스가 교황에게 매수되었으니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며 아이스툴프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라치스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곧 온 가족과 함께 로마로 피신했다. 이후 아들들과 함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들어갔고, 아내 타시아와 딸 로투다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렇게 수년간 수도자로서 생활하던 그는 756년 아이스툴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좌를 되찾으려 했다. 교황청의 지지를 받으며 파비아로 돌아온 그는 왕을 자처했지만, 토스카나 공작 데시데리우스 피핀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압박을 가하자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마음을 돌리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757년 3월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