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청주 평원군 출신으로 변양, 공융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스스로 식견이 화흠보다 뛰어나다고 여겼으며, 맑으면서 사물에 대해 널리 통달했고 효렴으로 천거되고 태위부로부터 벽소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유대를 천거했고 다음 해에는 유요를 무재로 추천하려고 하자 관리가 연이어 형제를 추천한 것에 대해 묻자 도구홍은 두 마리의 용을 메고 먼 길을 가는 것이나 기린을 부려 천 리를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비유해 그 두 사람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말했다.
185년에 왕분이 사람들을 모아 영제를 폐위하고 합비후를 옹립하려고 하면서 화흠과 함께 계책을 정할 것을 권유받아 가고자 했지만 화흠의 만류로 가지 않았다. 하옹이 원술을 꾸밈이 많은 사람이라 여겨 원술이 하옹을 원망했는데, 원술이 하옹에 대해 세 가지 죄가 있다면서 비난하자 도구홍이 이에 대해 반박해 하옹을 변호했고 30세에 사망했다.
관녕전에 따르면 정시 2년(241년)에 태복으로 있던 도구일(陶丘一)이란 신하가 영령궁 위위 맹관, 시중 손옹, 중서시군 왕기와 함께 관녕을 인재로 추천하는데, 이 도구일이란 사람과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