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번호 49번의 선수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팀 웨이크필드.
더글라스 앤서니 미라벨리 (Douglas Anthony Mirabelli) |
|
출생 | 1970년 10월 18일 ([age(1970-10-18)]세) |
애리조나주 킹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5cm, 100kg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2년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31번, SF) |
소속팀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96~2000) 텍사스 레인저스(2001) 보스턴 레드삭스(2001~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2006) 보스턴 레드삭스(2006~2007) |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
2004 | 2007 |
1. 개요
미국의 전 야구선수. 너클볼러 팀 웨이크필드의 전담 포수로 유명하다.2. 커리어
2.1. 선수 생활 초기
199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더블A 팀에서 타율 .296, 21홈런으로 무력시위를 하다가 트리플A로 승격되었고, 8월달에 처음으로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었다. 콜업 직후엔 별볼일없이 트리플A를 왔다갔다했다. 그러던 중 1999년 시즌, 샌프란시스코가 포수도 로테이션으로 자주 돌려줬기 덕분에 출전 기회를 많이 잡았다. 2000년엔 바비 에스텔라와 플래툰을 돌았는데 둘 다 주전 자리가 확실하지 않았다.그러다 2001년 스프링캠프에서 샌프란시스코가 베니토 산티아고[1]와 계약을 하며 미라벨리는 입지를 잃게 되었고, 이반 로드리게스의 백업 롤을 맡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여전히 타격이 발목을 잡아 이적하기 전까지의 타율 .102를 기록했다. 그 해 6월 주전 포수인 제이슨 배리텍의 팔꿈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보스턴이 미라벨리를 트레이드로 데려왔고, 스캇 해티버그와 마스크를 나눠썼다. 타격감도 많이 나아져 이적 후 타율이 .270에 9홈런.
2.2. 웨이크필드를 만나다
2002년 스프링캠프에서 자신과 호흡을 맞출 선발 투수를 찾던 중, 너클볼러 팀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포수가 미라벨리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그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미라벨리는 소프트볼용 글러브까지 착용하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웨이크필드와 찰떡 궁합을 자랑하는 배터리로 활약했다.그러나 너클볼을 잡을 줄 안다는 것을 빼면 그의 기량은 전년도 우승팀인 보스턴이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2005년 시즌 후 그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시키고 제이슨 배리텍과 조시 바드 체제로 재편하려 했다. 하지만 새 전담 포수 조시 바드와 웨이크필드가 2006년 4월 한 달간 거둔 성적은 1승 4패로 초라했고, 그 기간 동안 너클볼을 제대로 잡지 못해 발생한 포일이 무려 10개나 되었다. 결국 트레이드 5개월, 시즌 개막 한 달만인 5월 1일에 보스턴은 재트레이드를 통해 그를 다시 데려오게 된다.
여담으로 라이벌인 악의 제국은 보스턴이 미라벨리를 못 가져가게 하기 위해 고추가루 경쟁입찰을 했다. 양키스는 트레이드 당일 오후 7시에 시즌 첫 펜웨이 파크 원정경기를 치를 예정이었고, 레드삭스 선발이 웨이크필드였기 때문에 트레이드가 성사되면 당연히 미라벨리가 그 경기에 나설 것이었기 때문. 그러나 양 팀의 GM인 케빈 타워스와 테오 엡스타인은 평소 친분이 있었으며, 파드리스에는 베테랑 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있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2] 트레이드 성사 직후 레드삭스 프런트는 미라벨리를 바로 데려오기 위해 구단주의 전용기를 띄워 말 그대로 미국의 남서쪽 끝에서 북동쪽 끝까지 데려왔고, 6시 48분에 공항에 도착하자 경찰차를 동원하여 경기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출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미라벨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경찰차 안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고[3] 인사를 나눈 동료가 웨이크필드를 제외하면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비난을 들으며 1번 타자로 첫 타석에 들어섰던 조니 데이먼 밖에 없었다고.[4] 이렇게 모셔온 보람이 있었는지 웨이크필드는 7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를 거뒀으며 미라벨리는 삭스 팬들에게 The Savio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5]
2.3. 선수 생활 말년
다이나믹하게 보스턴에 복귀하긴 했으나 2007년 타격 부진에 시즌 말 발목 부상까지 입으며 선수로써의 활약도 불투명해졌다. 2008년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3월에 케빈 캐시[6]가 백업 포수로 영입되며 방출되었고 쓸쓸하게 은퇴했다.3. 플레이 스타일
당시 웨이크필드의 전담포수라는 것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과거 서술에서는 타율만을 근거로 기량이 미달인데 너클볼 받느라 리그에 남아있는 선수인 양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평가절하당할 선수가 아니었다.통산 성적은 566경기 1655타석 .231/.317/.407, 58홈런. 타율만 보면 형편없어 보이는 방망이를 가진 백업이지만 포수라는 점과 .724라는 OPS를 고려하면 생각보다 타격도 괜찮은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장 2023년 메이저리그를 예로 들면, 시즌 포수진 OPS가 미라벨리의 통산 OPS보다 나은 팀은 9팀밖에 없으며 당연히 리그 평균치보다 높다.
포수로서의 능력도 그렇게 처지는 편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21세기 최고의 포수 수비 능력을 보여준 야디어 몰리나, 20세기 후반 최고의 포수였던 이반 로드리게스 등과 비교해보면
- 몰리나 : 필딩율 .995[활동시기] / 18294 2/3이닝 96포일 549폭투
- 로드리게스 : 필딩율 .991[활동시기] / 20348이닝 127포일 830폭투
- 미라벨리 : 필딩율 .992[활동시기] / 3697 1/3이닝 74포일 138폭투
미라벨리의 많은 포일은 너클볼과 불규칙적인 출전을 고려하면 참작 가능한 부분이다. 실제로 보스턴 이적 전후의 커리어를 비교해보면 보스턴 이적 전 1514 1/3이닝 11포일, 보스턴 이적 후 2183이닝 63포일이다. 폭투도 이닝 대비 환산 시 로드리게스보다 적게 허용했다.
프레이밍은 당연히 올타임 톱급인 몰리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Framing Runs 상 커리어하이는 10(2001년), 웨이크필드 전담 시절에도 3~4 정도가 나오는 등 준수한 포구 능력을 보여줬다.
커리어 통산 도루 저지율은 28%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보스턴에 오기 전에는 35%로 훨씬 높았으며 당시 리그 평균 도루 저지율은 31%대 정도였다. 이 역시 보스턴에 오면서 급락했기에 너클볼러인 웨이크필드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라벨리는 포수가 약한 팀에서는 주전도 가능하며, 뎁스가 강한 팀에서도 괜찮은 백업급의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그러나 타율, 홈런, 삼진 등 직관적인 클래식 스탯만 중시하던 시절에 뛰던 선수였던데다 너클볼 전담포수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저평가당하게 한 것이다.
4. 기타
보스턴의 2004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유명한 해설 게리 쏜이 커트 실링의 붉은 양말 사건에 대해 미라벨리가 ' 그건 흘린 것(진짜)이 아닌 칠해진 것(가짜) '이라고 자기에게 말했던 바가 있다 주장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후 미라벨리는 해당 주장에 오해가 있다며 자신은 그저 농담을 했는데 그 해설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 했다.은퇴 후에는 미시간주에 위치한 프랜시스 고등학교에서 코치를 맡았다.
[1]
1987년
내셔널리그
신인왕 출신 공격형 포수. 올스타 5회 선정에 1996년 필리스 소속으로 30홈런을 쳐낸적 있으며, 2002년 NLCS MVP에 오르는등 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 행에 일조한 통산 217홈런의 포수였다.
[2]
대가는 조시 바드, 클라 메러디스 + 현금 10만 달러.
[3]
이 때 자기가 마치
슈퍼맨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영웅이 되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하다.
[4]
당시 사진을 보면 삭스 동료들이 매우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보인다.
[5]
여담으로 당시 이 영입 때문에
최희섭이 미라벨리에게 28번을 도로 뺏기고 로스터에서 제외되었다.
[6]
탬파베이 레이스의 감독 케빈 캐시 맞다.
[활동시기]
리그 평균 필딩율 몰리나 .993, 로드리게스 .991, 미라벨리 .991.
[활동시기]
리그 평균 필딩율 몰리나 .993, 로드리게스 .991, 미라벨리 .991.
[활동시기]
리그 평균 필딩율 몰리나 .993, 로드리게스 .991, 미라벨리 .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