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6 21:48:48

대동구락부(1889)

<colbgcolor=#f5f5f5,#2d2f34> 대동구락부
大同倶楽部
창당일 1889년 5월 1일
해산일 1890년 8월 17일
전신 대동단결운동정사파
후신 입헌자유당
1. 개요2. 역사
2.1. 결성
3. 활동4. 조직5. 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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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동구락부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정당이다. 1889년에 창당된 정당과 1905년에 창당된 정당 두가지가 있는데 다른 정당이지만 두 정당 모두 단명한 정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 역사

대동구락부는 자유민권운동기에 탄생하였다. 대동단결운동정사파에 내분 속에서 탄생하였으나 제국의회가 창설됨에 따라 입헌자유당에 합류하였다.

2.1. 결성

제국의회 개설을 유보하고 벌어진 반정부운동[1]은 핵심을 차지한 자유당이 당내 불순분자의 폭발이나 정부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메이지 17년[2]에 해산해 일단 조용해졌으나 메이지 22년[3] 2월 11일의 대일본제국 헌법 발의에 맞추어 시행된 대사면으로 역대 정치범이 석방된 것을 계기로 민권파의 세력[4]의 재결집 움직임이 활발해졌다[5]

이때 단결 후 운동의 형태로 정리된 정치단체를 지향하는 고노 히로나카 등 정사파와 느슨한 연락조직을 원했던 오이 켄타로 등 비정사파의 대립이 표면화됐다. 게다가 다이도 단결 운동의 주도자였던 고토 조지로의 정부 입성과 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을 둘러싸고도 운동 내부에서 의견 차이가 있어[6], 4월 28일부터 도쿄에서 열린 전국의 운동 간부의 회합에서는, 정사, 비정사를 둘러싸고 격론이 펼쳐져 결렬되었다가, 5월 10일 양 진영은 각각 따로 모임을 갖고 고노 등 정사파는 대동구락부를, 오이 등 비정사파는 대동협화회를 각각 결성한다.

3. 활동

주요 활동으로는 1년 앞으로 다가온 제국의회 개설을 위해 총선 준비[7], 그리고 각지와의 연락과 유세를 하였다. 한편, 같은 해 8월부터 9월에 걸쳐 조약 개정 반대 운동[8]이 들끓었을 때에는 운동의 일부를 담당해, 대동협화회등의 타단체와의 제휴도 일시적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운동이 종결되자 이들 단체와는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10월 17일 열린 임시대회에서는 당무 확장, 협화회와 대결할 태세를 보였다.

4. 조직

결성 때 정해진 당칙에서는 상의원회를 두어 각 부현 1, 2명을 선출하고 있었지만, 상술한 실무에서 회합의 참석자는 회를 따라 줄어들어 필연적으로 사무주임자[A]가 된 고노와 오에타쿠가 사무주임자[A]로서 당직을 담당했다.

5. 합동

상술한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이 진정된 후, 구자유당의 총재였던 이타가키 퇴조가 분열된 제파의 재결집과 자유당 재흥의 생각을 굳히고, 각파에 자신의 출마를 통지했다. 코노등 다이도 클럽측은, 이타가키를 메고 자유당이 재흥되었을 경우는, 오이등 다이도 협화회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부터, 12월에 이타가키가 쿠니모토 토사로부터 오사카에 나왔을 때에 담판에 이르러, 이 단계에서 이타가키의 구상은 좌절되었다[11]

합동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이듬해 들어서다. 5월 14일 대동구락부, 대동협화회에서 애국공당과 함께 3파 모임이 열린다. 여기에 규슈연합동지회도 가세함에 따라 9월 15일 입헌자유당이 창당된다. 대동구락부는 이에 앞서 8월 17일 해산한다.

합동 직전 메이지 23년[12] 7월 1일 치러진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대동구락부는 55석을 얻었다.

[1] 자유민권운동 [2] 1884년 [3] 1889년 [4] 구 자유당 및 입헌개진당 [5] 대동단결운동 [6] 그 후, 고토는 3월 22일에 구로다 내각의 체신 대신으로서 입각 [7] 부현회 의원의 조사와 입후보자 인선 [8] 외국인 사법관 임용 문제 [A] 후에 사무원 [A] [11] 이타가키는 독자적으로 애국 공당을 결성 [12] 18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