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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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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니콜라스 레이
Nicholas Ray
파일:the-essentials-5-great-nicholas-ray-films.jpg
본명 레이먼드 니컬러스 킨즐 주니어
Raymond Nicholas Kienzle Jr.
출생 1911년 8월 7일
미국 위스콘신주 게일스빌
사망 1980년 6월 16일 (향년 67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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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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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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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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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각본가, 영화 감독, 배우
활동 1946년 ~ 1980년
배우자 진 에번즈 (1936년 ~ 1942년, 이혼)
글로리어 그램 (1948년 ~ 1952년, 이혼)
베티 유티 (1958년 ~ 1970년, 이혼)
수전 슈워츠 (1971년 결혼)
자녀 4명

1. 개요2. 설명3. 기타4. 연출작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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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극( 그리피스)이 있었고, 시( 무르나우)가 있었고, 회화( 로셀리니)가 있었고, 무용( 에이젠슈타인)이 있었고, 음악( 르누아르)이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도 있을 터이다. 영화는 곧 니컬러스 레이다.
- 장 뤽 고다르[1]

미국의 영화 감독. 독일계 아버지와 노르웨이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50년대에 활발히 활약했다. 1949년 <그들은 밤에 산다>를 내놓으며 감독 데뷔, 데뷔작부터 단번에 명감독 라인에 입성, 이후 작품들로 느와르 장르의 대가가 되지만 당대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카데미 후보로도 몇번 지명 못 받았다. 더불어 난잡한 사생활에 폭음으로 인한 여러 문제로 영화계에서 반감도 받은 점이 커서 고다르가 평하던 대로 영화감독 재능이 거장급이었지만 스스로 잊혀지게 만들어버렸다.

2. 설명

어린 시절에는 러 크로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다. 레이는 어린 시절부터 술이나 약물에 손을 대던 불량 학생이었으며 성적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연극 활동을 하다가 RKO 영화사에 의해 픽업되어 1947년 <그들은 밤에 산다>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주로 누아르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1955년에는 제임스 딘을 주연으로 하여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영화인 < 이유 없는 반항>을 만들었으며, 이는 레이의 대표작이 되었다.

1960년대 즈음 레이의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자 그는 결국 < 북경의 55일> 촬영 중 해고된다. 그 뒤 무직으로 생활하다가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강의하게 되고, 점차 재기하게 된다. 이 시기 레이는 빔 벤더스의 <미국인 친구>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제자들의 조력을 통해 신작으로 실험 영화인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속된 건강 악화 때문에 레이는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의 편집을 미처 끝내지 못하였고[2],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빔 벤더스와 함께 찍은 <물 위의 번개>를 마지막으로 하고, 레이는 1980년 사망하였다.

3. 기타

오슨 웰스, 앨프리드 히치콕 등과 함께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감독들 가운데 하나이다. 카예 뒤 시네마의 ' 작가정책'의 주된 수혜자였으며, 특히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비슷한 시대의 거장 영화감독인 '조지프 로지'[3]와는 같은 러 크로스 출신이며,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4] 그렇지만 딱히 친분은 없던 걸로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공개적인 양성애자로 유명했다. < 이유 없는 반항>의 촬영 중에는 주연인 제임스 딘, 내털리 우드, 샐 미니오 모두와 염문이 돌았을 정도.

장 뤽 고다르는 니컬러스 레이의 비터 빅토리에 관한 글에서 '영화는 곧 니컬러스 레이다'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재능은 저렇게 거장급이었거늘 난잡한 사생활에 폭음으로 인하여 이 항목 사진에 나오듯이 늘그막에 한 눈까지 잃어 안대를 차고 다녔다. 1950년대 전성기 시절 사진을 보면 멀쩡하던 거랑 달리 70년대 사진을 봐도 노화가 꽤 심한데, 폭음에 골초였기에 폐암으로 죽었다.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할리우드 인사들 사이에서도 최악의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2살 어린 여배우 글로리어 그램(1923~1981)과 두 번째 결혼을 해서 티머시 레이(1948년생)를 낳았지만 4년만에 이혼을 하게 되는 데, 이혼사유가 글로리어가 전처 소생인 큰아들 앤서니 레이(1937~2018. 당시 15세)와 불륜관계인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글로리어는 니컬러스 레이와 이혼한 지 8년 뒤인 1960년에 기어코, 앤서니 레이와 결혼해서 두 아들인 앤서니 레이 주니어(63년생), 제임스 레이(65년생)을 낳았다. 의모와 의붓아들의 결혼생활은 14년 뒤 이혼을 하지만, 티머시 레이에게 글로리어는 엄마이자 형수가 되고, 앤서니는 형인 동시에 의붓 아버지가 되는 셈. (더군다나, 앤서니가 티머시의 친아버지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지만 그럼, 앤서니가 겨우 11살에 아들을 낳은 거다!) 할리우드 사상 전무후무한 스캔들이다.

4. 연출작 일람


[1] 출처 [2] 엄밀히 말하자면 재편집을 완료하지 못한 것이다. 일차적인 편집본은 레이 생전에 완성되었었지만 그는 해당 편집본에 불만족을 표했고, 영화는 오랜 기간 재편집을 거쳤다. [3] 1909~1984. <하인>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4] 레이는 불량아였지만 로지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