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온라인상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회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할때 "피해자가 네 가족이라고 생각해 봐." 또는 "피해자가 네 가족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냐?"라는 말을 남용하거나 과도하게 상황을 대입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충 신조어. 범죄자가 이에 맞는 처벌을 받지 않았을 때도 이런 얘기가 나온다.[1]2. 문제점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전혀 무관한 인간에게 닥친 불행이라도 크든 작든 어떻게든 동정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게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고 선한 면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남의 일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피해자 및 그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못된 자들이 존재하고, 바로 이런 자들을 꾸짖을 때 '너의 일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지극히 정당한 발화이다.하지만 이 문서에서 말할 정도의 '니가족충'은 그 감정의 대입이 지나치게 과하며 합리성이 부족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자 과도한 감정적 호소를 무기로 삼는다. 이는 얼핏 보면 역지사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술했다시피 그 정도가 과하면서도 사안을 따지지 않고 남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제3자는 물론이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에게도 자신들이 동정이 아닌 조롱을 당한다는 불쾌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더 나아가서는 불행한 사건 그 자체가 희화화되는 부정적 효과까지 일어난다. 동병상련이나 역지사지의 감정은 인간과 사회관계의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모든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 자체로도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의 본질을 흐릴 수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결론 도출을 방해하고, 새로운 인신공격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화법이다. 국가 전반에 이런 사고가 팽배해지면 결국에는 시스템이 규정하는 원칙과 절차가 무너지고 형식적 법치주의와 국민 감정에 따른 포퓰리즘만이 득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2][3]
친한 친구나 가족이 사망이나 중상 같은 불행을 당했다면 냉정하게 행동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4] 예를 들어 조난 사고 또는 건물 붕괴 사고에서 구출 소식이 없거나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을 때 유족이 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 심지어 울부짖으며 건물 잔해로 직접 달려가서 마구 파헤치려고 하는 행동은 객관적으로 보면 시신 수습에도 구출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심지어 후자는 또 다른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비합리적인 행동이지만 가족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로 편안히 집에 앉아서 평온히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을 보내며 누군가가 나 대신 가족을 구조해주기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건을 해결하려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는 분명 있기 때문에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의 감정을 감안하는 주관적 시각과 객관적 시각의 저울질이 필요하다. 모든걸 매우 냉정하게 이성적으로만 판단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기 때문다. 인간의 이성적 태도가 언제나 합리적일 수는 없다. 공감대를 형성하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여유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가족충의 제일 큰 문제점은 사회 이슈를 두고 항상 이러한 주장을 절대적으로 내세우게 된다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할 사건들을 처리할 때 감정이 이성을 덮어버리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사건을 두고 항상 감정에 호소하며 즉흥적인 판결을 내리게 될 우려가 있고 이것은 또다른 사회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물론 피해를 당한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도 좋을 리가 없다.
그 예로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중 조지 H. W. 부시의 상대였던 마이클 두카키스와의 TV 토론이 있다. 이 토론에서 듀카키스는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사형제로 범죄의 발생이 감소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성적인 답변이었지만 널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고, 결국 부시의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공격이 대중의 감정에 제대로 먹혔다.[5]
3. 대처법
일단 감안할 것은 상대방 본인이 피해자라면 처음부터 대처하기보다는 조금 진정시킨 뒤에 하자. 단순히 궤변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지만 피해 당사자라면 아무래도 비이성적 감정이 앞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각종 흉악범 변호를 도맡아 하면서 변호인에 대한 지나친 비난 풍조를 우려하는 변호사도 "피해자들이 우리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제할 정도다.[6]"내 가족이 아니라서 동정이 안 드는데 어쩌란 말이냐?", "내 가족이었더라도 그렇게 할 거야"라고 대답해 보면 대단히 높은 확률로 본래 논란이 되던 사안은 온데간데 없이 ' 후레자식', '나쁜놈', ' 공감 능력 결여' 등의 인신공격이 돌아오는 걸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니가족충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엿볼 수 있다. 니가족 타령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통념상 상대방이 절대로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일종의 사상검증, 협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논리와 사고가 없이 그저 상대방이 '예'를 선택했을 시 이어지는 반박 대신 나쁜 놈으로 몰아갈 준비만이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주로 정치적인 문제와 엮이면 특정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이런 몰아가기가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허술할지라도 집단에서 고립되고 유대감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중의 속성을 파고드는 효과가 있다. 즉, 자신들이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선함을 대표한다는 프레임을 설정한 뒤 대중들에게도 이성적, 비판적 사고를 버리고 억지로라도 자신들을 지지하게끔 강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분별한 니가족 타령은 논리의 문제를 감성의 문제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착하냐 나쁘냐라는 문제로 왜곡해버린다. 문제의 본질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누가 더 착한지 경쟁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라는 태도에 입각하여 반박하도록 하자. 일단은 착한 것을 떠나서 옳고 그른 것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저것 귀찮으면 역으로 니가족 타령도 가능하다. 보통 니가족 타령이 나오는 상황은 일반적인 조치나 보상으론 도저히 만족할 수 없어서 그것을 규정하는 법이나 규칙의 벽을 억지로 허물려 떼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무리한 요구로 인해 다른 방향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 혹은 집단이 새로 생겨날 가능성 역시 대단히 높다.[7] 이런 점에 착안해 '그렇게 됐을 때 네 가족이 ~된다고 생각해봐라'라고 역으로 받아쳐주자.
더 이상 개선할 방도도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난 사안을 계속 끌고 오거나 니가족 타령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지나치게 클 경우, '내 가족이 당했어도 이렇게까진 안하겠다'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 가족들이 정말로 억지를 쓰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등[8] 주의깊게 사연을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아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정확한 상황을 전혀 모르면서 그저 너무 오래봤다고, 내가 지겹다며,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 경우가 매우 많다. 이는 결국 본래의 취지가 변질되었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며 요즘은 앞뒤 생각 안하고 그저 "니 가족이 ○○○~"라는 문장만 나오면 정당한 말에까지 무조건적으로 니가족충이라고 몰아가는 현상도 매우 자주 보인다. 물론 이럴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대다수의 네티즌들에게 오만가지 쌍욕을 바가지로 먹게될 것이다. 알맞는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결국 네티즌들은 분탕질을 막기 위해 니가족충이라는 폭언을 퍼붓기보다 '가족 사정을 모르니까 개입할 수 없지만 안타까우니까 힘내라'라고 말하는 추세를 보였다. 실제로 기부 사기, 타진요와 한강 의대생 실종 사건, 세 모자 성폭행 조작 사건 같은 성폭력 무고죄, 푸드코트 화상 사고 같은 판춘문예 및 맘카페 여론조작 등 사실검증 없이 막 나가던 사건들을 다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4. 오용
이 말을 사용하는 데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 용어는 디시인사이드, 일베저장소, 워마드처럼 인명 사건사고를 악의적 목적으로 웃음거리로 삼는 계층이 자신들의 반(反)사회적 비하 행위[9]를 합리화하고 웃어넘기는 데 악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본인들이 잘못했고 그에 따른 지극히 정당한 비난을 받았음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그저 '네 다음 니가족충' 한 마디로 비웃고 넘겨 버리는 식이다. 이 때문에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오남용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인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해당 단어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이 단어가 줄 수 있는 인상의 심각성에 대해 별 고민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니가족충이란 단어는 그렇게 우스갯소리로 넘겨 버리기엔 사회적 비난과 여파가 매우 클 수 있는 단어이므로 지극히 주의해야 한다.자칫하면 "그깟 사람 좀 죽은 것 가지고 왜 그리 유난이야?" 식의 극단적인 인명 경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소수라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다가는 수십, 수백명의 죽음에도 그런 식으로 대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5. 가해자가 내 가족이라면?
의외의 사실은 피해자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반대로 가해자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데도. 가족이 살인범에게 살인당해도 살인범을 사형하는 것에 반대할거냐는 논리는 반대로 내 가족이 누구를 살해해도 내 가족을 사형하는 것에 찬성할 거냐는 논리(?)로 간단히 반박 가능하다.사실, 인간은 자신이 피해를 입는 상상은 자주 해도 자신이 피해를 입힌다는 상상은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방어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 등 픽션 작품 대부분이 죄없고 선한 주인공에 독자가 감정이입하게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사례나 복수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히려 가해자가 더 이해되는 상황도 있다. 이은석 존속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물론, 저런 못된 짓을 저지른 놈이 내 가족이라면 아예 절연하겠다거나 극단적으로 "내가 직접 때려 죽여버리겠다!"거나 "팔다리를 자르고 양눈을 뽑겠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진다. 실제로 강력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가족들도 사실상의 연좌제로 피해를 보기 때문에 정말로 호적에서 파거나 절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6. 여담
-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발로 "니가족충이 니가족이라고 생각해봐"라는 반박도 나오기 시작했다.[10]
- 과격한 환경론자나 동물 애호가들이 본 표현을 남용해서 희화화가 심해졌다. 예를 들어 개를 네 가족으로 생각하라 등...
- 배심제를 도입한 나라에서는 실제로 법정에서 이런 논리가 사용되기도 한다. 할리우드 법정 영화에도 간혹 나온다. <타임 투 킬(1996)>에서도 주인공 변호사가 비슷한 발언을 한다.[11]
7. 관련 문서
- 감성팔이
-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
-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 중 정치병자들
- 판사 가족이 당했다면
- 언더도그마
- 역지사지
- 역차별
- 국민정서법
- 민식이법
- 1988년 미국 대통령 TV토론회
- 이재명 - 노란 리본을 그만 달고 다니면 안되냐는 한 시민의 말에 "당신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을 할 거야"고 한 바 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이 후의 발언으로, "당신같은 사람이 나라를 망치는 거야"도 정치인으로써는 쓸데없이 과격한데 뒤이어 "당신 자식도 이런 일을 당할 날이 있을 거야"며 시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1]
해당 사건의 재판을 맡은 판사가 대중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만큼의 형량보다 가벼운 형량을 내리기로 선언했다면 "판사님 가족이 이런 일을 당했어도 가해자에게 그런 가벼운 판결을 내릴 겁니까?" 따위의 이른바
판사 가족이 당했다면 발언이 나오기도 한다.
[2]
과거 왕정시대가 그랬다.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이고 군중심리를 이용한
공개처형도 자연스러웠다.
[3]
이전 각주의 가장 핵심적인 사례는
북한이다. 한국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것이 남녀노소 연령불문 집단성이 매우 심해 누가 선동할 것도 없이 자체적으로 감정적인 판단을 쉽게 하기에 위험하다.
[4]
사람의 심리라는 게 간사해서 정말로 '냉정침착하게' 행동하면 또 그건 그거대로 '자기 가족/친구가 저런 일을 당했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냐.'는 뒷말을 듣는다. 심지어 가해자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사고라면 '사실 저 사람이 범인이라 저런 것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으니...
[5]
사실
뭘 선택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대답했다면
이중잣대 내지는
내로남불이라고 욕을 먹었을 것이고 이후 발언의 설득력이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가족을 예시로 든 상황에는 결국 이성이 감성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6]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과
우이동 아파트 경비원 갑질 사망 사건,
이영학 사건 등에서 변호를 맡은 신철규 변호사가 한 말이다. 그는 "세상의 비난을 받는 피고인들도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사건을 파고 들어가면
정상 참작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경우도 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것은 헌법 상 권리이고, 아무리 비난을 받아도 대변을 해줘야 하는 것이 변호사의 의무"라는 말을 추가로 남겼다. 하지만 헌법의 취지가 아무리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해도 참혹하게 죽어간 자식의 시신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울부짖는 부모 앞에서 '가해자가 비록 살인마지만 변호인들이 그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두둔해주는 것도 이해해줘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란 정말로 쉽지 않기 때문에 유족의 원망과 증오를 이해하는 것이다.
출처
[7]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하다. 어떤 규칙이건 현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에는 다 나름대로 명분과 이유가 있는 법이며 그때까지 세상사람들은 기존 규칙에 적응하고 맞춰서 살아왔기 때문에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민이 아닌 순간의 감성에 기반한 변화가 일어났을 경우 원래 있던 규칙이 어지간한 악법이 아닌 한은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보게 되어 있다.
[8]
예를 들자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명령자의 정체에 대한 진상규명 등.
[9]
전술한 대로 '남의 일이라는 이유로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며 피해자 및 그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짓들
[10]
사실 '니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고 주장하는 쪽이 니가족충들인 만큼 '내 가족도 아닌데 왜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야하냐'라고 주장하는 비-니가족충들에게 할 수 있는 반박은 아니다. 오히려 "니가족충들은 왜 비-니가족충들이 니 가족이라곤 생각 안해보냐?"라고 반박하면 몰라도... 실제로 비-니가족충들이 '그럼 너는 내가 니 가족이었으면 이렇게 악플을 달겠냐 ?' 라며 반박을 하는 케이스들도 있다. 이쯤되면 너무 개싸움이어서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11]
딸을 성폭행한 백인 범죄자 2명을 사적제재한 흑인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강간 당한 아이가 백인이었다면 용서할 수 있겠느냐?"라는 뜻에서 눈 감고 상상해보라고 발언한다. 배경이 되던 시대에는 흑백 인종차별이 만연해 백인 대상 범죄와 유색인종 대상 범죄의 선고가 다르게 내려지던 명백하게 불평등한 시대였고 이 영화의 소재가
인종차별이기 때문에 이 장면 자체는 감동적인 명장면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