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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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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넝마주이 2010년대의 넝마주이
1. 개요2. 역사3. 근로재건대4. 2000년대 이후의 '폐지 줍는 노인'
4.1. 고물 가격의 변화

1. 개요

다리 밑 움막에서 큰 광주리를 짊어지고 나온 넝마주이는 갈고리를 뱅뱅 돌리며 다리 위로 올라간다.
- 박경리 《시장과 전장》 중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헌 옷이나 헌 종이, 박스, 폐품 등을 주워 모으다가 고물상에 파는 사람이다. 길거리에서 폐지가 가득 쌓인 큰 나무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넝마[1]워 가는 로, 넝마 + 줍- + 이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넝마꾼이라고도 부른다.

2. 역사

이들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서울에 약 40~50곳에 모여 살았고, 동냥( 구걸) 이외에도 넝마주이를 하기도 했다. 넝마주이는 사설막(대원들을 거느린 주인인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 ‘자작’(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만든 막) 등의 조작을 갖추었고, 망태기와 집게를 사용하여 일을 했다.

1950년대에는 큰 광주리나 망태기를 짊어지고 그 안에 폐품을 넣고 다녔기 때문에 망태기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존재였다. 그래서 넝마주이를 무서워하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또한, 6.25 전쟁 전후 넝마주이 일을 하던 소년 고아들을 가리켜 양아치라고도 했다.

사회적 차별과 정부의 감시는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넝마주이를 하려면 근로재건대에 등록한 후 지정된 복장과 명찰을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미등록 넝마주이는 처벌했다. 또 이 때의 넝마주이는 도시 외곽의 다리 밑에 모여 살고 초라한 옷차림으로 주택가에서 넝마주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기피 대상이 된 후 경찰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서울시는 1981년 3월 넝마주이를 비롯한 자활근로대 약 1,000명을 환경미화를 위해 집단 이주시켰다. 이후 정부는 1981년 12월 이들을 다시 서울시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를 비롯한 10개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1986년부터 강남구 대치동 양재천 영동5교 아래에서 윤팔병[2]을 중심으로 ‘넝마공동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2012년 11월 강제 철거되었고, 1990년대 이후로 환경미화원이 성장하며 조직적 넝마주이는 사라져 가고 있는 추세이다.

3. 근로재건대

1962년 정부에 의해 조직된 넝마주이 단체로 관할 시청에서 넝마주이 등록을 받은 후 복장과 명찰을 달아야 지정구역 내에서만 취업하도록 했으며, 등록을 하지 않은 넝마주이는 넝마주이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등록된 넝마주이들은 경찰의 관리와 감독을 받았다.

1962년 6월 정부는 잠재적 우범자로 간주되던 넝마주이를 관리하기 위해 등록 사업을 하여 서울 지역의 넝마주이 1,280명이 근로재건대가 되었으며, 11개의 경찰서에서 이들을 수용하고 관리했다. 경찰서별로 근로재건대가 조직되었고, 넝마주이는 서울에 1,218명, 부산에 1,180명, 대구에 600명, 대전에 500명 등 3,500여명이 있었다.

근로재건대는 종교단체나 시민단체에서도 운영했지만 1979년 6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자활근로대로 통합되었다. 자활근로대는 조직 및 운영관리는 경찰이 담당하고 시설 및 복지환경 개선을 보건사회부가 담당하였다. 1995년에 폐지되었다.

4. 2000년대 이후의 '폐지 줍는 노인'

'넝마주이'라는 용어 자체는 2000년대 이후인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방송에서도 이 표현 대신 그냥 '폐지 줍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비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여긴 듯하다.[3]

오늘날에는 고물상의 발달로 조직적인 넝마주이들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폐지와 고철을 주워 수입을 올린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수급액은 2010년대 말 1인가구 월 50만원 정도로 간신히 쪽방촌 생활이 가능한 정도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자는 4대보험이 나오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져서 소득이 생기면 수급액이 줄어들거나 수급 대상자에서 탈락한다. 따라서 기초수급을 계속 받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저축을 하려면 폐지 수집, 공공근로, 지하철 퀵서비스 외에는 마땅한 직업이 없다. 그리고 기초수급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도 폐지 수집을 한다. 예를 들면 법적인 부양의무자가 존재하면 기초수급을 받기 어렵다. 그러나 법적인 부양의무자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거나 그 부양의무자가 불효자이거나 무능력자일 경우 부양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법적인 부양의무자에 의한 부양을 받지 못하면서도 기초수급에서 탈락할 경우 살아남으려면 노숙자들처럼 쉼터와 무료급식에 의존하거나 넝마주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시간대나 날짜를 가리지 않고 불규칙하게 고물을 버린다. 따라서 폐지 줍는 노인들의 근로시간은 대개 길다. 2011년 한 조사[4]에 따르면 조사대상 중 36%가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며 60%가 '눈, 비오는 날, 명절 등을 제외하면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2016년 즈음에는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 종일 폐지를 주우면 하루 5천원~7천원, 월 20만원 정도를 번다. 이들은 하루 2~3번 정도 고물상에 들러 고물을 판매한다. 특히 노인이거나 건강이 좋지 않을 경우 체력이 떨어지다 보니 수입이 더욱 낮다. 2012년 한 신문에서 90세의 할머니와 5시간 동행한 결과, 2.11km밖에 이동하지 못했고 600원밖에 벌지 못했다. 체력이 떨어져서 1시간 30분 꼴로 30분 가량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폐지 줍기가 경쟁이 심하다 보니 밤과 새벽에 일을 하기도 한다. 운전자가 수레를 잘 보지 못하다 보니 이 시간대에 폐지수집 노인 교통사고가 집중된다. 서울에서는 2016~2018년 3년간 18명(연평균 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일찍 해가 져 교통사고 위험이 더욱 높아지며 눈길에 미끄러져 낙상하기도 쉽다. 게다가 수레를 끌고 가다가 차를 긁거나 하면 곤란한 분쟁에 빠지기 쉽다.

2017년에는 폐지줍는 노인의 수레에 광고를 달아주기도 한다. 광고 효과도 있고, 광고비도 노인에게 일부 돌아가기도 한다.

4.1. 고물 가격의 변화

2016년 1월 말 기준으로 폐지 가격이 1kg에 70원이고 고철은 80원이니 돈은 거의 되지 않는다.

2017년 말에는 중국의 대형 쇼핑몰에서 박스 소비량이 늘어 종이 수출이 늘어난 덕에 폐지 가격이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1kg당 150원까지 올랐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생계 때문에 넝마주이 일을 하는 노인들의 처지가 나아진 건 아니었다. 폐지를 줍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폐지 자체를 구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폐지 값이 오르자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이들도 폐지를 줍기 시작했다. 심지어 건물주들까지 폐지를 주우러 나설 정도. 이들은 차량을 동원하여 대량으로 폐지를 수거해가기 때문에, 직접 수레를 끌며 폐지를 수거해가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폐지 가격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상태이다. 실제로 폐지 가격이 낮아지면서 부피는 커도 가벼운 알루미늄 캔 위주로 넝마주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부피 때문에 옮기기 귀찮긴 해도 무거운 것보다는 나으니까.


[1] 명사 낡고 헤어져 입거나 덮는 데 쓸 수 없는 옷이나 이불 따위를 뜻하는 말.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2] 1941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대한민국 빈민운동계의 대부로 알려져있는 사회활동가로 2001년에 설립한 아름다운 가게의 대표였다. 2018년 2월 25일 향년 78세로 위암으로 별세했다. [3] 그러나 비하적 표현은 그저 단어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단어의 어감이 아니라 '그 단어가 가리키는 존재'를 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넝마주이 대신 '폐지 줍는 사람'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이래로는 폐지 줍는다는 어감 자체에 비하의 뜻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러니까 폐지나 줍고 살지" 같은... [4] 관악구 재활용품 수거 어르신들의 생활실태와 개선방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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