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남출이(南出伊) |
출생 | 1881년 10월 9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창수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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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월 24일 |
경상북도 영덕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위패 8판-2면-317호[1]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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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출이는 1881년 10월 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창수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가담하려다가 유지들과 의논한 끝에 자신이 사는 창수동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창수동은 도로 공사를 빌미로 전답을 일제에게 강제로 빼앗겨서 불만을 품은 동민들이 많이 있었다. 이 때문에 급조한 시위였음에도 참여한 이가 백 명이 넘었고 이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창수동주재소에 이르렀을 때의 규모는 4백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점거한 후 청사에 부속된 유치장을 부수고 총기류, 대검류 기타 서류를 파기한 뒤 오후 7시에 철수했다.
이후 체포된 남출이는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같은 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살아가다 1932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남출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5월 30일 그를 기리는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세웠다.
[1]
9행 31열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