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효종 6년(1655)년에 통신사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왔으며,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1]을 원자[2]로 부르는 데 반대하다가,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명천(明川)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신라 때부터 조선 인조때까지의 시를 모아서 지은 기아(箕雅)와 종사관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지은 부상록(扶桑錄), 호곡만필 (壺谷漫筆)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호곡집(壺谷集)이 있다. 현대에는 조선시대의 시비평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