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나카가와 히데마사 中川秀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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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568년 5월 2일 ~ 1592년 음력 11월 27일 또는 음력 1599년 5월, 향년 25~3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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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아들이자 분고 오카번 초대 영주인 나카가와 히데시게의 형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딸 쓰루히메를 아내로 두었다. 일본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그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과 중국의 기록은 포로가 되어 1599년에 명으로 압송되어 처형된 것으로 나온다.2. 역사
아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사쿠마 노리마사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전사하자, 셋쓰 국 이바라키 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1584년에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여했고,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워 하리마 국 미키 6만 5천여 석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1587년 규슈 정벌과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하였다.1592년 임진왜란에 8군으로 참전하였으나 그해 수원에서 매사냥을 하다 조선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일본과 한국 ‧ 중국이 서로 다른데 일본 측 기록인 '일본전사 조선역'에는 1592년 11월 27일 수원 인근에서 매사냥 중 조선군의 매복에 걸려서 전사했다고 되어있다.
그 해 11월에는 권율과 최철견이 이끄는 조선군이 독성산성에 주둔하며 유격전을 벌이며 한양으로 북상하는 중이었으므로 아마 이들에게 공격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영지가 몰수될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정찰 중에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거짓보고하였으나 매사냥을 하던 사실이 히데요시에게 발각되어 진노를 샀다. 그러나 아버지 기요히데의 공적으로 인해 동생인 히데시게가 영지를 상속하게 되었고 다시는 헛되이 사망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는다.
그런데 선조실록을 보면 평수정(平秀政, 平秀正)에 관한 기사가 3번 등장하는데[1] 여기 나오는 평수정(平秀政)은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한자발음인 중천수정(中川秀政)을 조선과 중국에서 다르게 부른 것으로, 일본 무장들이 헤이지(平) 가문의 일원이라고 밝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을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평행장(平行長), 가토 기요마사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평청정(平淸正)이라 기록한 것과 같다. 중국 기록에서는 조선에 파견된 명 장수 형개(邢玠)가 집필한 '경략어왜주의(經略御倭奏議)'에서 평수정이 등장한다.[2]
사은사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형 군문(刑軍門)에게 나아가 행례(行禮)를 하고 나서 평수정 등 61인을 해송(解送)하였습니다. 황상(皇上)이 오문(午門)에 친히 나아와 포로들을 바치는 일이 끝난 뒤 하례를 받았는데, 신들도 하례의 반열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관원을 보내 교(郊)와 종묘에 제사지내 고하였습니다. 황상이 구중 궁궐 깊이 거처하며 정양하느라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여 년 이나 되었는데, 지금 심 각로(沈閣老)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아오니, 뜰에 있던 군교(軍校)들 중에는 용안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축수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부가 신들에게 상품을 의례적으로 하사할 것을 주청하니, 황상이 특별히 별지(別旨)를 내려, ‘국왕에게 마땅히 답례하는 하사품이 있어야 하니, 너희 부가 조사해보라.’ 하였습니다. 예부가 비로소 전례를 참고하여 다시 황상의 결재를 품하고 또 칙서를 줄 것을 청하여 곧이어 성지를 받았습니다. 당초에 예부에서는 만력 31년에 흠사(欽賜)한 예를 상고해서 아울러 성지를 품했어야 옳을 것 같았는데, 방치해두고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배신 등에게 상품을 하사할 것만 청한 것은 크게 결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라는 명이 특별히 성은에서 나왔으니, 본국을 돌아보고 생각하시는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사유를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신들은 흠사(欽賜)한 망의(蟒衣)와 채단(彩段)을 예부에서 받았습니다. 칙서를 올려 보냅니다."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4일 신미 1번째기사
"신들이 형 군문(刑軍門)에게 나아가 행례(行禮)를 하고 나서 평수정 등 61인을 해송(解送)하였습니다. 황상(皇上)이 오문(午門)에 친히 나아와 포로들을 바치는 일이 끝난 뒤 하례를 받았는데, 신들도 하례의 반열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관원을 보내 교(郊)와 종묘에 제사지내 고하였습니다. 황상이 구중 궁궐 깊이 거처하며 정양하느라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여 년 이나 되었는데, 지금 심 각로(沈閣老)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아오니, 뜰에 있던 군교(軍校)들 중에는 용안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축수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부가 신들에게 상품을 의례적으로 하사할 것을 주청하니, 황상이 특별히 별지(別旨)를 내려, ‘국왕에게 마땅히 답례하는 하사품이 있어야 하니, 너희 부가 조사해보라.’ 하였습니다. 예부가 비로소 전례를 참고하여 다시 황상의 결재를 품하고 또 칙서를 줄 것을 청하여 곧이어 성지를 받았습니다. 당초에 예부에서는 만력 31년에 흠사(欽賜)한 예를 상고해서 아울러 성지를 품했어야 옳을 것 같았는데, 방치해두고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배신 등에게 상품을 하사할 것만 청한 것은 크게 결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라는 명이 특별히 성은에서 나왔으니, 본국을 돌아보고 생각하시는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사유를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신들은 흠사(欽賜)한 망의(蟒衣)와 채단(彩段)을 예부에서 받았습니다. 칙서를 올려 보냅니다."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4일 신미 1번째기사
지난번 동이(東夷)의 소추(小醜) 평수길(平秀吉)이[3] 외람되이 하례(下隷)로서 감히 환란의 단서를 일으켰다. 예봉(裔封)을 점거하고 제도(諸島)를 예속한 다음 끝내 침식할 뜻을 일으켜 우리 내부(內附)의 나라를 엿보았다. 그리하여 이기(伊岐)·대마(對馬) 사이에 사나운 고래가 기세를 부렸고 낙랑(樂浪)·현도(玄菟) 지경에 칼날이 교접하였다. 군신이 도망을 치고 인민이 이산되자 주문(奏聞)을 올려 급박한 사정을 고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 일컫는 나라인데 마침 곤액을 당하였으니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약자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은덕에 감화할 것이며, 강자가 죄벌을 도피한다면 누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곧 팔다리와 같은 울타리이고 이 적은 문정(門庭)의 적인데이겠는가. 그 난을 막고 난리를 평정하는 것이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터이라 이에 일대(一隊)의 군사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평양의 한 차례 싸움에 교만한 적은 이미 낙담하였건만, 적은 견고함을 믿고 갖가지 꾀를 부리면서 겉으론 순종하나 속으론 역심(逆心)을 품었다. 본심은 해치려 하면서도 짐짓 애걸하는 태도를 지었다. 그리하여 책사(冊使)가 귀환하지도 않았는데 흉적의 위엄이 다시 치성해 졌다. 이에 짐은 그들의 교활함을 통찰하고 홀로 마음속으로 결단하였다. 곧 군국(郡國)·우림(羽林)의 인재를 선발하고 돈을 주거나 벼슬을 주는 포상을 아끼지 않았다. 기필코 훼복(卉服)121) 을 일소하고 해파(海波)를 맑게 하려 하였더니 천지의 홍은(鴻恩)과 종사의 은덕을 힘입어 신이 벌을 내려 적의 괴수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구축하고 정병과 기병을 아울러 쓰면서 길을 네 갈래로 나누어 일심으로 협력하여 그들의 마초와 군량을 태우고 소굴을 공격하니, 밖의 후원도 끊기고 안으로 계책도 없었다.
이에 동악(同惡)이 섬멸되고 군추(群酋)가 도주하였다. 전선(戰船)은 모두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바닷물이 끓어 올랐고 버리고 간 무기가 산처럼 쌓여 전진(戰塵)이 일소되었다. 비록 오랫동안 교만을 부린 적이라 하나 하루아침에 남김없이 소탕하였다.
홍안(鴻雁)이 돌아오니 기자(箕子)의 봉한 나라가 여전하고, 웅비(熊羆)가 회군(回軍)하니 한가(漢家)의 위엄과 덕화가 전파되었다. 노획한 적의 수급(首級)을 모아 경관(京觀)을 만들어 평수정(平秀政) 등 61인을 잡아들여 사형을 집행하고 그 머리를 천하에 조리돌려 길이 흉역의 경계를 삼고 쾌히 신인(神人)의 분심을 씻어버렸다. 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기사
평양의 한 차례 싸움에 교만한 적은 이미 낙담하였건만, 적은 견고함을 믿고 갖가지 꾀를 부리면서 겉으론 순종하나 속으론 역심(逆心)을 품었다. 본심은 해치려 하면서도 짐짓 애걸하는 태도를 지었다. 그리하여 책사(冊使)가 귀환하지도 않았는데 흉적의 위엄이 다시 치성해 졌다. 이에 짐은 그들의 교활함을 통찰하고 홀로 마음속으로 결단하였다. 곧 군국(郡國)·우림(羽林)의 인재를 선발하고 돈을 주거나 벼슬을 주는 포상을 아끼지 않았다. 기필코 훼복(卉服)121) 을 일소하고 해파(海波)를 맑게 하려 하였더니 천지의 홍은(鴻恩)과 종사의 은덕을 힘입어 신이 벌을 내려 적의 괴수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구축하고 정병과 기병을 아울러 쓰면서 길을 네 갈래로 나누어 일심으로 협력하여 그들의 마초와 군량을 태우고 소굴을 공격하니, 밖의 후원도 끊기고 안으로 계책도 없었다.
이에 동악(同惡)이 섬멸되고 군추(群酋)가 도주하였다. 전선(戰船)은 모두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바닷물이 끓어 올랐고 버리고 간 무기가 산처럼 쌓여 전진(戰塵)이 일소되었다. 비록 오랫동안 교만을 부린 적이라 하나 하루아침에 남김없이 소탕하였다.
홍안(鴻雁)이 돌아오니 기자(箕子)의 봉한 나라가 여전하고, 웅비(熊羆)가 회군(回軍)하니 한가(漢家)의 위엄과 덕화가 전파되었다. 노획한 적의 수급(首級)을 모아 경관(京觀)을 만들어 평수정(平秀政) 등 61인을 잡아들여 사형을 집행하고 그 머리를 천하에 조리돌려 길이 흉역의 경계를 삼고 쾌히 신인(神人)의 분심을 씻어버렸다. 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기사
명에 사은사로 간 한응인 일행이 평수정 등 61인의 포로를 명 황제에게 압송했더니 황제가 궁에 틀어박혀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년이 지났는데 심 각로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오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황제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황제가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일을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한응인 일행에게 칙서와 하사품을 내렸다. 평수정 외 61인을 사형에 처하고 머리를 천하에 조리돌렸다는 내용이다.
3. 동명이인 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카가와 가문의 본성은 평(平)씨가 아니다. 나카가와 가문은 미나모토(源)를 칭한다. 히데마사의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에 대한 일본 위키백과 문서. 즉 나카가와 히데마사=평수정이라는 주장은 기본 전제부터 틀린 주장이다.더욱이 수(秀)와 정(政, 正)은 일본 인명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는 한자다. 더불어 무사들 중 평(平)가문 출신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백번 양보해서 히데마사의 대에 갑자기 본성을 평(平)으로 바꿨다치더라도 매사냥 중 죽은 평수정과 명나라에서 죽은 평수정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고 포스팅
위 포스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 평수정은 1592년이 아닌 1598년 노량 해전에 붙잡혔다는 기록이 <경략어왜주의>에 언급되는 점과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어서 동일인물로 보긴 어렵다.
2. 더불어, 평수정의 기록이 실린 형개의 보고와 명나라 기록에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테라자와 히로타카 역시 사망했다고 나온다.[4] 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 두 인물은 노량 해전에서 살아남아 세키가하라 전투에까지 참전한다. 즉, 평수정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 자체를 보장할 수 없다.
3. 테라자와 히로타카를 잡았다는 진린의 보고에는 나카가와 히데마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즉, 노량해전에서 평수정이란 인물을 잡은게 사실이라 가정해도, 이 인물에 대한 다른 언급이 없다는건, 이 인물은 테라자와보다 급이 낮은(= 즉, 다이묘급이 아닌) 인물이라는 반증이다.
4. 무엇보다 명나라 기록에서 평수정은 사쓰마의 왜장이라 나와있으나,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셋쓰국 출신이다.
5.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히데마사는 1592년에 수원에서 매사냥을 하던 도중에 잡혀 처형당했다. 지휘관이 쓸데 없는 짓이나 하다 죽었다는 사실에 격노한 히데요시가 그 동생을 대신 당주로 삼아 조선으로 보냈는데, 정작 본인이 멀쩡히 살아서 노량에 참전할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조선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해서 복귀했을 수 있으나, 그랬다면 이에 대한 가문 내 문서나 사건 기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히데마사가 수원에서 잡혀죽은 것은 사실이고, 노량에서 죽은 것은 다른 인물이다. 두 사건이 동일 인물에게 발생할 수가 없다.
즉, 평수정의 이름이 올라간 기록 자체에도 이미 거짓 보고가 많이 섞여있어 신빙성이 의심되며, 노량에서 생포된 평수정과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신상에는 차이가 있고, 또 수(秀)와 정(政, 正)은 당시 굉장히 흔하게 쓰이던 글자이기에 단순히 이름이 같고, 조선에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점만으로 이 둘을 같은 인물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본성 자체가 평(平)씨가 아니다.
4. 동일인물 설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매사냥 중에 조선군에 공격받은 뒤 일본 측의 기록은 사망으로 되어있는데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누가 빠져나와 어떤 보고를 했는지 시신은 수습했는지의 정황을 나타내는 기록이 없다. 나카가와 가문에서 영지몰수를 우려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 보고를 한 점을 미루어 볼 때[5] 포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잘못봤거나 사망으로 거짓보고 했을 정황이 충분하다. 매사냥하다 사망이 아니라 포로로 붙잡혔다면 히데요시의 진노는 한층 더해져 가문으로서는 정말 영지를 몰수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또한 평수정 외 61인을 명 황제에게 압송한 것은 조선 사신 한응인 일행이고 명군이 아닌 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포로이기에 수원에서 조선군에게 공격받은 나카가와 히데마사와 상황이 일치한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각군 지휘관 및 다이묘들의 이름과 직위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압송한 포로 62명 중에서 평수정을 대표격으로 내세웠고 이 평수정이 조선과 명 측 기록에서 여러차례 언급된다. 이는 평수정이 포로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인 것을 의미하고 다이묘인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그에 부합한다. 포로가 된 평수정이 동명이인의 인물이라면 명 황제에게 압송해서 대표격으로 내세울 정도로 상당히 높은 직위의 인물이어야 할 것이나 나카가와 히데마사 외 평수정으로 알려진 동명이인의 기록이 없다.
조선정부는 나카가와 히데마사 외 다른 인물들에게도 평씨로 추정하는 사례가 있었기에 성을 다르게 추정했다고 해서 나카가와 히데마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오류가 있다. 동명이인이라 주장하려면 임진왜란에 참전해 포로가 된 동명이인의 평수정이 누가 있는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동일인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1]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0일 정묘 4번째기사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4일 신미 1번째기사
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기사
[2]
단 경략어왜주의의는 명 지휘관들의 보고를 받고 형개가 집필하였는데 거짓보고와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3]
도요토미 히데요시
[4]
전자는 전사, 후자는 생포 후 처형
[5]
이 사건 외에도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이나 축소 보고를 한 경우는 상당히 많아 일본 측 기록이 조선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대마도주가 서신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기본이었고 전방의 다이묘들은 조선·명과 자체적으로 협상을 하고 히데요시에게는 보고하지 않거나 다르게 보고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전과에 있어서도 조선은 구체적으로 나오는 데 반해 일본 측의 기록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