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08:47:26

나오에 카네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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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江兼続
1560년 ~ 1619년 1월 23일

1. 개요2. 상세3. 일화 및 에피소드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전국시대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 '가부키모노' 마에다 케이지와의 우정으로 유명하다. 전국 3군략 중 한 명.[1] 그런데 다른 두사람은 절망적인 전력차로도 이기거나 전설적인 무용으로 분전한 기록이라도 있는데 이 사람은 절망적인 전력차로도 처발린게 가장 인상적인 전력이다.

2. 상세

원래 이름은 히구치 요로쿠로, 우에스기 가문의 중신인 나오에 카게츠나의 양자가 되면서 나오에 카네츠구로 개명하였다. 이 양자로 될 때의 에피소드가 좀 특이한데, 나오에 카게츠나가 양자를 모집할 때, 에치고의 내로라하는 신동들은 다 갔지만 카네츠구만은 제발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카게츠나가 카네츠구를 불러서 명품다기를 들어갈 것 같지도 않은 작은 상자에 넣어보라고 시키자 카네츠구는 이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깨뜨려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카게츠나가 나무라며 목을 베겠다고 하자 '한 사람의 사무라이와 다기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명을 따라서 행했을 뿐이며, 나는 우에스기가의 신하인데 댁이 무슨 권리로 나를 베겠다는 건가?'라고 역으로 따졌다. 이 말을 들은 카게츠나가 감탄하여 바로 양자로 삼게 되었다는 이야기.

...라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실제로 카네츠구가 나오에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카케츠나 사후의 일이다. 카게츠나 사후 나오에가의 가독은 사위인 노부츠나[2]가 계승했지만 아래에 서술되는 오타테의 난 종결 후의 논공행상 과정에서의 분쟁에 휘말려 노부츠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자 카게카츠의 명에 의해 카네츠구가 미망인이 된 카게츠나의 딸인 오센과 혼인하게 되어 나오에의 성을 이어받게 된다. 참고로 카네츠구의 어머니는 카게츠나의 여동생으로 원래부터 카네츠구는 카게츠나에게 조카뻘이 되는 관계(즉 부인인 오센과는 사촌의 관계)라는 설이 있었으나, 학자들의 가계도 연구에 따르면 아무런 친척관계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여담이지만 카네츠구는 일생 첩을 두지 않았을 정도로 부인과의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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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츠구의 갑옷과 투구

사랑 () 자가 강조된 독특한 장식의 투구은 애염명왕의 愛. 어린 시절부터 나가오 카게토라의 시동을 맡으며 군략을 곁에서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애민, 자애 등으로 해석해서 사랑을 중시하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왔지만, 최근의 학설에서는 전국시대에 무사들 사이에서 군신(軍神)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아타고곤겐(愛宕権現)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후대의 평가는 극히 엇갈리며, 에도시대에는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도 '주군을 무시하고 가문을 몰락시킨 자'라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후에 우에스기 요잔대에 이르러 나오에 카네츠구를 욕하지 못하게 하면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3]

우에스기 켄신이 사망하자 친구인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급히 옹립, 성을 차지하고 카게토라 파를 섬멸하였다. 이를 오다테의 난이라고 한다. 이 사건 이후로 나름대로 유능했던 우에스키 카게카츠가 이 사건으로 인해 쥐여 살고 무시당하며 나오에 카네츠구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했단 의견도 있지만, 오타테의 난 당시 카네츠구의 나이는 채 20도 되지 않았고 카게카츠는 카네츠구보다 4살이 위다. 그리고 카네츠구가 실권을 쥐게 된 것은 나오에 가문을 계승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히데요시 집권 당시 30만석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자신의 가신이 될 것을 제의받은 적이 자주 있었고 밑에서도 언급되지만 이에야스도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할 정도로 주군에 대한 충의를 지켰기 때문에 주군을 업신여겼다고 보긴 힘들다.

시바타 시게이에[4]가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흉이다. 주가의 원군없이 아시나가를 물리쳤으나 아무 은상을 받지 못하자 카게카츠는 시게이에에게 산죠를 공략하면 그곳을 영지로 주겠다고 약조한다. 시게이에가 산죠를 공략하자 카네츠구는 여기는 본래 우에다 나가오씨의 땅이었다며 시게이에가 갖는 것을 반대한다. 이에 카게카츠가 니카타성을 축성하면 그곳을 영지로 주겠다고 약조하나 이 역시 카네츠구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된다. 결국 빡칠대로 빡친 시게이에는 카츠이에와 내통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 일은 하세도우 합전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도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쳐발린 일과 함께 카네츠구 거품론의 근거가 된다.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말하기를, '돌아가신 어르신을 따라잡는건 너무나 요원한 일이나, 주군이 어르신의 모습을 흉내내고, 소생이 어르신의 군략을 흉내내면 둘이서 어느정도 따라잡을 수는 있을것이오' 라 말했다고 하며, 이후 카게카츠는 평생 사람들 앞에서 웃지를 않아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일 정도였다. 또한, 카게카츠는 전장에서도 결코 움직이지 않고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는데, 이런 카게카츠의 모습을 가신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따랐으며, 우에스기 집안의 일사불란한 가풍은 이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에스기 가문이 사전통보도 없이 거성의 증축과 개보수를 행하자 당주인 가케가츠더러 직접 교토에 출두하여 해명하라고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카네츠구는 '나오에장'[6]이라는 이에야스를 욕하는 장문의 글을 써서 이에야스에게 보냈는데, 이에야스는 평소에 별로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하나 이 나오에장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 만큼 분노하며 '내 생애 이렇게까지 열받아 본 적은 없다'라고 했다고 할 정도니 그 글빨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특히 그 마지막 부분이 "역심이 없으면 상경해서 해명하라 하시는데 오히려 태합전하께 역심을 품었던 분께서 상경하셔서 용서받고 새로이 땅까지 하사 받으셨으면서 지금은 권세가들과 인척관계를 맺으신다. 우리 주군이신 가케가츠님은 그런 수치도 모르는 짓은 하지않음"...이라는 내용.

나오에장을 쓴 목적은 이에야스를 열받게하여 우에스기를 토벌하러 오게 만드는 사이 서쪽의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 틈을 타 이에야스의 본거지를 제압하는 계획이었으나, 이에야스가 결국 침착하게 미츠나리와 싸우러가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를 대폭 감봉조치하는 한편, 카네츠구를 가신으로 맞아들일 의향을 내비쳤으나, 카네츠구는 스스로 우에스기 가에 남았다. 이는 카네츠구와 카게카츠 사이의 유대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겠다. 감봉당해 요네자와로 내려간 후 카네츠구는 영지의 치수작업이나 농토개발에 집중하여 30만석의 요네자와의 소출량을 51만석까지 끌어올렸고, 도쿠가와의 중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인 혼다 마사시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요네자와번에 부과될 책임을 면제받도록 로비를 펼쳤으며, 거리를 정비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가문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카네츠구 사후 나오에가는 단절되게 되는데 일설에는 가문에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후계자를 맞아들이지 않고 영지를 주군에게 돌려주기 위해 일부러 가문을 단절시켰다는 설도 존재한다.

세키가하라전투 당시 우에스기가는 동쪽의 모가미, 다테 연합군과 맞서싸웠는데, 다테가에게는 우세하였지만, 모가미가와의 전투에서는 밀린데다 진을 필요이상을 길게 늘였다고 하여 카네츠구의 군략적 재능을 의심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1619년 12월에 60세로 죽었는데, 카네츠구의 부음을 전해 들은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주군보다 먼저 죽는 가신이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냉철하고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기로 유명했던 카게카츠가 이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카네츠구에 대한 카게카츠의 신뢰를 엿볼 수 있다.

3. 일화 및 에피소드

  • 카네츠구의 부하 하나가 사소한 시비로 농민을 죽여버렸다. 그 농민의 가족들은 이를 탄원하여 카네츠구를 찾아왔다. 카네츠구는 정중하게 이들을 대하며 '정말 미안하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대신 배상을 하고 범인을 처단하겠다'며 금을 두둑히 건네고 살인자를 곧바로 처형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금은 필요없으니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 못하겠으면 당신 목숨으로 갚으라'며 카네츠구를 협박하였고, 이에 카네츠구는 '그럼 염마대왕에게 소송을 걸어 살려내주겠다. 대신 염마대왕에게 문서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하다.'라며 이들을 죽여버렸다. 이후 성앞 거리에 그들의 목과 함께 '염마대왕에게 고함, 실수로 죽인 사람이 있으니 살려내 주기 바람'라는 문서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 유학을 배운 당시 몇안되는 학식있는 무사의 하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서적의 입수에 열을 올렸다 하며,[7] 특히 금전을 천하게 여기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여러 다이묘들이 모이는 자리에 다테 마사무네가 서양식 동전을 들고와서 자랑하고 있었다. 모두 신기해하며 동전을 돌려보고있는데, 우에스기의 가로 신분이라 말석인 카네츠구의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톡톡 튀기며 보았다. 이에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신분상 염려하는 줄 알고, '괜찮아 야마시로노카미(카네츠구), 손바닥위에 놓고 봐도 된다구'라고 배려하자, '우리 우에스기 가문은 켄신공 이래 무문의 명문이고 소생은 주군 카케가츠님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고 있는데 이런 부정한 물건을 손에 댈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탁구를 치듯이 부채로 동전을 쳐서 마사무네 앞으로 던져놨다고 한다.
  • 위의 에피소드에도 그런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지만, 정적이던 다테 마사무네를 매우 경멸해서 여러 차례 공공연히 모욕을 주었다고. 하루는 마사무네를 성 안에서 지나가던 길에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카네츠구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물론 다이묘와 일개 가로의 신분차이 상 말도 안 되는 무례였기 때문에 마사무네는 마구 화를 냈는데, 카네츠구는 당연히 정적인 마사무네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대답했다고. "아, 이거 죄송합니다. 뒷모습밖에 본 적이 없어서 얼굴을 몰랐습니다..." 전장에서 참패하고 도망치는 뒷모습밖에 본 적이 없다는 조롱.
  • 일설에 따르자면 우에스기 겐신과 와카슈도의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확하게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어서 아직 그냥 그런 설이 있다는 것에 불과한데 거꾸로 말하자면 그것을 부정할 만한 증거도 아직까지는 없다. 당시에 사무라이치고 얼굴이 좀 반반하다 싶으면 중도라는 소문도 흔한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생애불범이라고 칭하며 미혼으로 남았지만 여기서 불범은 미혼을 지키겠다는 것이지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고, 어쨌거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서 현재 연구는 진행 중이다.
  • 군재에 대해서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이 많으나 내정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 수 없을 정도로 활약했다, 특히 우에스기가가 에치고 90만석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전봉되었을 때 신속하게 처리한 것으로 유명. 10만석이 안되는 영주도 가신 및 전봉 후 영지배분 등으로 전봉 시에는 굉장한 고생을 하며 이로 인해 전봉 과정에서 말썽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대대로 에치고에 기반을 두고 가신들도 에치고 호족들로 구성되었으며 석고만 해도 90만석이 되는 우에스기가의 전봉 작업이 신속하고 잡음없이 진행된 것으로도 카네츠구의 수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세키가하라 이후 우에스기 가문의 영토가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어 혼란에 빠졌을 때도 나오에 카네츠구가 앞장서서 가신단 정리를 솔선하며 감봉의 후폭풍을 빨리 수습하였다.
  • 우에스기 몰락의 계기이자 세키가하라 전투의 계기가 되었던 나오에장은 사실 없었다는 설이 있다.

4. 대중매체에서



[1] 나머지 둘은 시마 사콘 사나다 마사유키. [2] 우에스기 카게토라와 마찬가지로 불꽃의 미라쥬에 등장하는 나오에 노부츠나의 모티브가 되는 그 인물이다. [3] 당시 포로였던 강항선생이 일본의 소문, 평판 등을 듣고 집필한 ' 간양록' 을 보면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에 대해서 그리 좋은 이야기는 없다. [4] 음은 시바타지만 오다가의 시바타 카츠이에와는 아무 관계없다. 이 사람은 新發田이고 카츠이에는 柴田이다 [5] 선대인 켄신시절에는 약간 통제가 안되는 사례가 있다. [6] 나오에장은 매우 유명하지만 한 편으로 후세에서 이에야스까가 만들어낸 위작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점차 연구가 진행되면서 위작이거나 혹은 최소한 후세에 누군가가 고쳐쓴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문법이 이상하거나 당시에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 써있는 등 수상쩍은 면이 많다 [7] 점령한 조선의 성에서 다른 장수들이 도자기나 장신구 같은 보물을 찾을때 카네츠구는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그때의 전리품들이 요네자와시 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