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나성호(羅聖鎬) |
생몰 | ? ~ ? |
출생지 | 함경북도 회령시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나성호는 함경북도 회령시 출신이지만 언제 출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2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내무부 특파원 안정근, 왕덕삼(王德三)은 길림성 화룡현의 국민회 통신부장 박용훈을 만나 회령에 함북독판부를 설치하고 간도에 총판부(總辦府)를 설치하여 총괄하게 했다.이때 회령시에서 동지 18명과 함께 독립문서 배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나성호는 그해 7월 최방연, 정희용(鄭熙鎔), 허익근 등과 함께 회령에 간도 국민회 지회를 설치할 것을 논의하고 오순준(吳舜濬)을 지회장으로 선임해 간도로 파견했다. 오순준은 박용훈으로부터 함북독판부 설치를 전달받은 뒤 회령으로 돌아와 나성호, 정희용 등에게 전달했다.
나성호는 우선 함북독판부 임원을 선정한 뒤 정희용과 함께 간도 국민회 본부로 건너가 안정근을 만나 함북독판부 설치와 제반 활동계획에 관해 협의하고 돌아왔다. 그 후 나성호 등은 폭탄을 밀반입하여 회령지역 관청과 은행 등 일제 주요기관 파괴와 친일파 처단을 위해 총기와 탄약 확보, 군자금 모집 등 일련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12월경 회령경찰서에 의해 체포된 나성호는 1921년 11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항소했지만, 1922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이후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8월 27일 출옥했다. 이후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나성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