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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3년 05월 31일 ~ 1985년 12월 27일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이다.

2. 생애

1913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그해 충청남도 군속을 지냈다. 194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일제 시대에 관료를 지낸 경우는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은 대한 제국의 관료였다가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일제 관료로 중용된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오늘날의 중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 소지자로 토지조사사업의 말단 실무에 종사하다가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하급관리로부터 출발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1930년대에 고급관료의 등용문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문합격자들은 초스피드로 승진하여 임관된 지 10년여에 도참여관까지 진출했고, 사무관급으로서 차지할 수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인 총독부 과장 혹은 고급관원으로 발탁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해방 후 신생대한민국 정부의 고급관료, 나아가서 역대 정권의 권력 엘리트로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이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다[1]. 정운갑은 이 세번째 유형으로 볼수있다

8.15 광복 경기도 지방과장과 인사처장을 거쳤다. 그리고 중앙 관료가 되어 1951년 총무처 경제국장, 1954년 총무처장을 지냈다. 1955년 4월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을 거쳐 그해 11월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 새로 만들어진 신민당에 윤보선계로 참여한 이후 그는 1958년 이후 1978년까지 5선의 국회의원이 된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자 정부는 남북통일과 경제 안정 및 전쟁 복구를 국가의 당면 목표로 하여 경제 안정과 회복을 위하여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경제부 처장으로 임용하기 시작하였다. 경제 안정과 전화 복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소위 실무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대거 기용되어, 경제 재건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들이 이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2], 94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운갑은 농림부 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다. 당시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시 농업은행과 농업조합 등의 사안들이 다루어졌다. 또한 대충자금 등에도 농림부 장관이 관여하였다. 대충자금(counterpart fund)은 당시 한국정부가 가지고 있던 중요한 재원이었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 '청와대 화재 사건'이 발생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기도 하였다 [3].

제1공화국 당시 자유당과 관료는 상당한 정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간의 인적 교루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장관들은 대개의 경우 장관직을 그만두면 이후 자유당으로 들어가 정계로 입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운갑 역시 장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이후 정계로 진출하였다

이후 정치인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 소속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선거구에서 출마해 민주당 이충환 후보를 꺾고 당선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이번에는 민주당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 음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4년 국민의당을 탈당하였고, 1966년 신한당에 입당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박준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민병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민당 정책심의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이태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5월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당권파와 비주류 연합의 대결이었다. 이철승이 중도통합론을 주장하면서 주류 김영삼계에 맞선 대회였는데, 이 비주류 연합의 중심 인물들에 이철승, 신도환, 고흥문, 정해영, 김원만 등과 함께 정운갑도 들어가 있었다. 정운갑은 오세응 등 13인의 중도파와 함께 비주류의 반김영삼 대열에 동참하였다.[4] 1979년 이들의 연합을 통해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중도통합론의 기조하에 강경한 대정부 투쟁보다는 협조와 타협이 강조되게 되었다. 중도통합론의 지지로 김영삼에 반대했던 정운갑은 신민당 가처분 결정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김영삼 체제와 대결한다. 중도통합론은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를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극한적인 개헌 투쟁보다 여야가 민생 위주의 정책대결을 벌이자는 이른바 양극단 배제론이었다. 신민당 측이 주장하는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정치적으로 협력할 것이 있다면 협력하고 외교·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는 중도 통합론에 대해 김대중, 김영삼측은 정부·여당과 야합했다는 의미로 ‘사쿠라 여당’이라 규정지으며 논쟁이 생겼다 #. 이후 상황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참조

1979년 신민당 원외지구당 3인방(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파동 때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총재직무권한대행에 임명되었다.

정운갑은 소속의원들을 접촉한 결과 대행직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의원이 43명으로 이를 반대하는 13명보다 많아 다수 의사에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총재대행직을 등록, 합법성을 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 지지 결의 서명 운동에서는 42명의 소속의원이 호응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비서명의원은 25명밖에 되지 않았다. 정운갑과 그 지지측은 합법성만을 인정받았을 뿐 권한 행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5].하지만 합법성만 가진 신민당 가처분 역시 10ㆍ26박정희 암살 사건이후 유신정권이 무너짐에 따라없어지게 된다

1985년 12월 28일, 신당동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 중 정우택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합격 후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제15대, 16대, 19대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새누리당)과 민선 충청북도 지사를 지냈다.

2.1. 친일 논란

일제강점기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것때문에 2005년 친일인명사전 예비편찬 당시 친일인사 명단 후보자에 명단에 오르는 등 #, 친일파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검토결과 2008년 이전에 명단에서 제외 되고 2009년 11월 8일 공개된 최종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2001년부터 시작해 8년 동안 여러 차례 명단을 거르고 걸러 이번 사전을 발간한 것이다. 다만 알려진 대로 이번 인명사전 발간은 시작일 뿐이다. 정운갑 전 장관은 2008년에 만든 예비 자료에도 이름이 없는 것을 보니 그 이전에 이미 대상에서 제외된 것 같다. 그러나 제외됐다고 해서 친일행위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행적이 불확실해서 수록이 보류된 384여명에 대해서는 향후 사전을 개정·보완할 때 반영하겠다”고 하였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이에 대해 “1930년대 들어 시작된 일제강점기의 고등문과시험은 지금의 행정고시에 필적할만한 고위관료의 등용문이었다”면서도 “민족문제연구소가 분명히 품계를 기준으로 친일행위 여부를 분류했을 텐데 그 기준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현재까지는 수록되지 않았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정운갑의 이름은 없다. #


[1] 이기동, 일제하의 한국인 관사들, 신동아, 1985년 3월호, 458쪽 [2] <한국의 정치변동과 관료제, 1945~1972 :국가관료제의 변천 과정 > [3] 『동아일보』, 1957년 2월 21일자 [4] 야당40년사, 337쪽 [5] 《야당4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