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3:07:27

김흠돌의 난

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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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신문왕 대에 발생한 반란 모의 사건이다. 그러나 곧바로 진압되었으며, 이후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2. 배경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사의 숙청왕으로 신문왕이 있다. 기나긴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을 거치며 이전의 신라와 완전히 달라진 통일신라에는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공신이 가득했고, 훗날 고려 광종이나 조선 이방원처럼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3. 전개

아버지 문무왕의 관 앞에서 유조에 따라 곧바로 즉위한 지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김유신 휘하에서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운 장군 김군관 상대등에서 해임하여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한다. 김군관은 백제,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통일전쟁을 통해 거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윽고 며칠 지나지 않은 8월 8일에 바로 신문왕의 장인이기도 한 잡찬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김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군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면 상당한 위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김군관 강등으로 김흠돌 세력이 도모하던 역모가 사실상 세상에 드러나자 김흠돌은 준비기간을 일주일도 갖지 못하고 서둘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신문왕은 이미 예상했던지 준비한 진압군을 이끌고 반군을 격파하여 진압한다. 이에 반군의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고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었다. 아직 상복도 벗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반란에 신문왕은 분노해 반란세력을 철저히 추적했는데, 산으로 도망간 잔당은 3~4일에 걸쳐 샅샅이 추적해 모두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파진찬 김흥원, 대아찬 진공을 비롯한 상당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잔당 소탕을 완료한 후 8월 16일에는 교서를 내린다.
16일에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이 왜소한 몸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不仁)·불의(不義)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 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 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天地)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宗廟)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 함께 버리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리를 범하고 풍속을 해침에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들 무리 가운데]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고,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샅샅이 찾아 모두 죽여 삼사일 안에 죄수 우두머리들이 탕진되었다. 일이 부득이 했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오.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사와 말들을 빨리 돌려보내도록 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나의] 이러한 뜻을 알게 하라.”

그리고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모반죄에 엮어 궁에서 쫓아내버리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후처로 들였다.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김흠돌이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다.

4. 이후

며칠 뒤 김흠돌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신문왕은 앞서 병부령으로 강등한 김군관 역시 참수해버렸다. 그 죄목은 김흠돌의 모반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을 멸하지는 않았고 김군관의 아들 한 명만 자결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어쨌든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이 정치판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숙청극을 통해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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