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3 17:23:04

김홍일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의 장남에 대한 내용은 김홍일(1948) 문서를,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범죄자에 대한 내용은 김홍일(범죄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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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壹
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
1. 소개2. 일생3. 기타4. 연보5. 선거이력

1. 소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전 군인, 정치인이다. 초명은 홍일(弘日)이며, 호는 일서(逸曙), 산남(山南)이다. 중국어 이름으로는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등을 썼다.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1]에서 출생하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 창군에 참가했고, 6.25 전쟁 초반 기적을 일으켰다.[2]

광복 당시 중국군, 일본군, 광복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을 역임하며 대부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경험한 장성급 장교였으며, 중국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학습한 인물이다.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일본육군대학출신이고 여단장 지휘경험이 있는 홍사익 중장 정도다. 단순히 군사지휘경험만으로 따진다면 김석원[3] 대좌(연대장 경험)를 예로 들 수 있다.

2. 일생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4]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군비단을 이끌다가 자유시 참변-적백내전 와중 백군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자 '적의 적은 동맹'이라는 취지로 적군에 투신, 임정계열 무장단체를 같이 지휘하게 되었고 백군의 공세에 맞서 하바로스크까지 이어진 적군의 지연철수전 과정에서 백군에게는 악명을, 적군에게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5]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독립운동에 활동했으며, 특히 병기 및 보급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1932년 국민혁명군 상해 병기창 주임 직에 있을 때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접촉하여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하였다.[6][7][8]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후 일본에서 왕웅이라는 중국 군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때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김홍일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호 일서(逸曙)를 쓴 왕이슈(왕일서, 王逸曙)란 이름으로 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상해에서 내륙으로 전근을 가게된 김홍일은 보급참모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1933년에는 초공 제2로군 총지휘부 상교참모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에는 국민혁명군 제102사단 참모장교로 활약했다. 1939년에는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뤄줘잉(나탁영, 羅卓英) 상장의 제19집단군(야전군 급) 참모처 처장이 되었다. 이후 1941년 샹가오 회전(상고회전, 上高會戰) 초기에 부상당한 제19사단장 탕보인(당백인, 唐伯寅)을 대신하여 사단장 직을 임시로 맡아 전투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9]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 최고위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대학 특별반(2년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별반 졸업 후인 1944년 1월에는 제1병단 참모처 처장에 보임되었다. 이후 당시 전국의 지식청년 지원병(학도병)들을 조직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제19집단군 참모 시절 사령관이던 뤄줘잉(나탁영, 羅卓英) 상장 지휘 하에 국민혁명군의 신편 지식청년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자세한 것은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10] 참조.

2.2. 8.15 광복

2.2.1. 군인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위밍(두율명, 杜聿明) 장군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2성장군)으로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홍일(당시 왕일서/왕이슈)이 너무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의 여건 및 처우 개선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해주는 일을 하자 두위밍 장군이 전체회의에서 "왕 장군은 무슨 조선인들의 대표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을 돕는단 말이오?"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참모들이 웃으면서 "조선인들의 대표지요"라고 말을 했고, 그가 사실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두위밍 장군은 한교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그가 조선인들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귀환하려고 하는데, 북한 남한 중에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과거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분란이었던 자유시 참변을 겪은 김홍일은 남한을 선택했다고 한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이전의 풍부한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국군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장군인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7대 교장(1949.1.15.~1950.6.10.)에 취임하여 후배 양성에 힘을 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열린 군 원로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고 한다. 공식전사에 의하면 군 원로들과 함께 한강 방어를 제안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국방부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김홍일 장군의 회고록에서는 전 병력을 모아서 결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지연전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병력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을 게제했으나 전략연구를 해본 인사가 없어서 자신의 주장이 공허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신성모, 채병덕, 이응준, 김홍일,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김석원이었는데 여기서 육군대학에서 군사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김홍일 장군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김석원 역시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그 어느때보다 김홍일 장군이 열을 올리며 한강선 결전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이 적극 동조했으나 국방장관 총참모장이 구체적인 대답을 않고 희망섞인 기대만 하고 있어 유야무야 끝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다음날 김홍일은 6월 27일 채병덕의 요청으로 1사단 작전지도를 맡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파주로 달려가보니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어서 1사단을 작전지도하기보다는 의정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습격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적 전차가 창경원에 침입하였다는 전보를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곧바로 백선엽에게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도강 후 후퇴하여 한강 동안에서 방어에 대비하되 수색과 행주에 공병대를 파견하여 선척을 집합하고 치중부대를 먼저 도하시킨 다음 부근 민가를 몇 집 헐어 그 재목으로 보병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하는 것을 지도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육본의 명령이 사수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을 한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 정말 답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11] 아무튼 백선엽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은 직속 상관이 아니었기에 명령이 아니라 조언이라는 한계를 느낀 김홍일은 채병덕에게 찾아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철수 그거 뭐임? 이러는 채병덕 앞에서 말이 먹히지가 않았다.[12]

전황은 심각해졌고,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사수!! 북진통일!! 나가자!! 이러고 있었으니... 결국 5개 사단[13]이 철수하기 이전에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가 폭파당했다. 결국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1사단마저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 때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1인 사령부였으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축해 낸다.[14] 공식전사에서는 채병덕이 김홍일 장군을 시흥사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적었으나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이응준 장군과 함께 피로에 쩔어있던 채병덕에게 찾아가 설득해서 시흥사 자리를 쟁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15] 그리고 김홍일 장군이 부임하면서 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라주바예프의 전쟁보고서의 내용이다. 초기만 해도 부실한 부대로 적혀있던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6일만에 견실한 전투부대로 이야기가 바뀐다. 라주바예프는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초기대응이 부실하고, 주로 소화기와 대인화기 중심이므로 전차대대의 공습을 받으면 급격히 무너졌다 등의 평가를 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이 부임한 이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한국군 포병이 포대 단위의 경우 매우 효과적이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보여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역시 화력덕후의 피는 속일 수가 없다 백선엽의 <군과 나>에 의하면, 부하에게 말끔하게 장군복을 다려오라고 한 다음 위엄있는 모습으로 서서 흩어져 도망치는 병력들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에게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부대에 복귀하게 한 것.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 현재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16]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후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안강-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명태사건으로 1사단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김석원 장군이 시흥국민학교 지휘소로 김홍일 장군을 찾아와 도와줄 일이 없겠냐며 찾아온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곧 재편된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진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분이 구국영웅인 이유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지연작전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군이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에 5개 사단이 사라졌다. 그나마 1사단은 중화기와 소화기는 상실했지만 제대를 유지하면서 퇴각했고, 중부의 6사단, 동부의 8사단은 적을 격퇴하면서 후퇴 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개 사단[17]은 전 병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약장을 떼어내고 한강변에 달려가 병사들과 싸우면서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남하하려고 했다고 적혀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렇게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이를 전투능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했다. 만약 이렇게 조직화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지연작전이나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병력 자체가 없어서 무너졌을 것이다.

거기에 단순히 병력을 모은 것만이 아니라 병력을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7연대인데 17연대가 시흥사에 도착하자 병력이 부족함에도 후방으로 후퇴시켜 수습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1사단의 경우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백선엽의 군과 나에 서술되어 있듯이 백선엽은 한강 도하 이후 병력을 찾을 수 없어서 소문을 듣고 시흥사에 가보니 1사단 병력이 남아있어 재회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김홍일 장군이 퇴각중이던 병력을 수습하고 1사단을 수습한 것이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없었으면 1사단은 제대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1사단이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면 백선엽이 자서전에서 우리 남쪽에서 살아서 보자고 병사들에게 말했다고 적었을리가 없다.

시흥사 인사배치도 적절했는데 당시 김홍일 장군의 시흥사는 그냥 1인 사령부였다. 기껏해야 김홍일 장군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 정도였다. 김홍일 장군의 이전 직책이 비전투부대인 학교장이었으니 휘하 병력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거기에 한국군의 철수장면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장교들은 약장을 떼어 누가 장교인지 병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을 수습하여 순수 지휘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철수하던 유재흥을 붙잡아 참모장을 시키고, 퇴각 중이던 무슨 장교를 찾아 부관을 시키고, 소대장이 부족하면 하사를 소대장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예루살렘 방어전을 진행한 이벨린의 발리앙 정도다!

그렇기에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격찬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전 당시 채병덕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18]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 1군단이 된다. 김 장군은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을 기획한다. 이때 임명장의 내용을 보면 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제대운영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임명한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후 이 분이 세우신 지연작전에 따라 국군은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하였고, 김석원과 같은 예편된 사람을 곧바로 기용하여 수도사단으로 임명하는 등,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하였다. 이 분이 있었기에 낙동강 전선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 상륙작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미군의 역할이 대한민국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 분이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전을 대성공시켜 무려 7일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기에 남한이 존재할 수 있었다.[19]

하지만 9월 1일 부로 예편된다. 그 이유는 미 고문관과의 갈등이다. 이에 대해서 김홍일 장군도 스스로 미군과 갈등이 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8사단장인 이성가 장군이 철수하던 중에 북한군의 공세가 심해 먼저 보급기차를 후방으로 보내고 병력을 퇴각시키자 미 고문관이 달려와 왜 보급품을 병사들에게 배급하지 않았냐, 이거 횡령아니냐 하는 식의 발언을 해서 전황과 국군의 현황을 천천히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횡령이다는 말만 반복하자 뚜드려 패주고 싶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20][21]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이 미군 지휘부의 명령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자 미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와서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승만이 김홍일을 찾아가 설득한 일화가 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직전 김홍일 장군은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밀려난다. 한국군에서 군단급 제대를 운용해 본 유일한 경험자이며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야전 지휘관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난 이 사건에 대해 전쟁초기 수도사단을 지휘했던 일본군 출신 김석원 준장은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22]

해임의 근거로는 이른바 안동철수작전에서 입은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철수를 반대하던 1군단 지휘부와 무조건적인 철수를 강권했던 미 고문단의 견해 차이가 주라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미 고문단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을 철수를 반대했던 김 장군이 지게 된 셈이다. 김홍일, 김석원 두 노장의 특징은 미군 고문관의 판단에 잘 따르지 않는데다 미군으로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극도로 싫어했다. 때문에 미군의 반격작전을 진행하는데 이 두 분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결국 두 노장은 동시 퇴장했다. 특히 밑의 부하들에 대한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도 이 두 노장의 파워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물러나게 하면 후폭풍이 크겠지만 미국에서 원하는 일이라 진행했다고 적혀있다.

2.2.2. 정치인

결국 더 이상 야전 경험을 살릴 수 없었던 김홍일은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중국통 경력을 살려 전후 중화민국 대사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군정 기간 동안 외무부장관으로 재임했다.[23] 그러나 박정희가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한데다가 한일협정까지 맺자 박정희와 결별. 이후 한국독립당을 재창당했으나, 선거에서 참패한데다가 이후 보궐 선거를 통해 배출한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 하필이면 김두한. 결국 김두한이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니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니 하는 사건들을 일으키자 한독당 자체가 자연스럽게 소멸해버린다. 이후 신민당에 입당해 7대와 8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던 중 유진산의 지도노선에 반발하여 1973년 양일동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3. 기타

중국군에서 중장[24], 한국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기록 때문에 합해서 '오성'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군에서 임관할 당시 계급이 준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고 한다.[25][26]

중국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과 일본 육사 출신인 이응준의 관계는 그들의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면서 창군기에 대해 “李=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고 “金=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이었다고 공감했다.(이응준,김홍일,1976「光復軍․創軍時節」 『세대』제14 권,통권 157호,71쪽)또한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에 따르면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2014.6.9.)

1985년에 KBS 국군의 날 특집 드라마 '오성장군 김홍일'이 예편때까지의 삶을 다뤘다. 그러니 군 예편때까지의 생애만 다루어 담당배우는 민지환.

2010년 방영된 KBS 드라마 전우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박웅' 장군이 등장한다. 담당배우는 이덕화.

4. 연보

1898년 9월 평북 용천 출생
1920년 1월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및 소위 임관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 북벌에 참여 (동로군 인사참모 소교, 인사과장 중교)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 진급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및 1대대장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 22사단 독립경비연대장, 용담전투 승리공훈, (공로장 수여받음)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상해 병공창 병기창주임, 19로군 후방 정보국장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거사에 쓸 폭탄을 구해 주다.
1933년 중국군 제2로군 총지휘부 참모
1938년 중국군 제4군단 102사단 참모장, 무한회전 참가, 만가령 전투
1939년 5월 중국 중앙군 소장진급 (중앙군 최초 한국인 장성), 중국군 19집단군 참모처장 부임
1941년 중국군 19집단군 19사단장 대리로 부임하여 중일전쟁 상고회전을 승리로 이끔 (대 일본군 33, 34사단)
1943년 중국군 육군대학 졸업
1944년 중국군 신편 2병단 참모장, 중국 지식청년군 훈련총감부 참모처장
1945년 5월 중국 중앙군 중장 진급
1945년 6월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
1945년 11월 중국군으로 복귀,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및 한교사무처장 부임
1947년 중화민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
1948년 대한민국에 귀국
1948년 12월 대힌민국 육군 준장 임관 (창군 최초 장군임관자)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교장
1949년 3월 육군 소장 진급(대한민국 육군 최초)
1950년 3월 13일 육군사관학교 교장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장
1950년 6월 30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한강선 방어전투 지휘)
1950년 7월 5일 육군 제1군단장 임명
1950년 7월 24일 육군종합학교 교장
1951년 3월 2일 육군 중장 진급
1951년 3월 20일 육군 중장 예편
1961년 5월 외무부 장관
1961년 12월 제9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1967년 6월 대한민국 국회 제 7대 국회의원
1971년 5월 대한민국 국회 제 8대 국회의원
1973년 1월 민주통일당 창당발기인
1980년 8월 8일 지병으로 타계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 마포구 지역)) 신민당 44,506(43.8%) 당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4번) 신민당 - 당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 종로구· 중구 지역)) 민주통일당 28,447(21.4%) 낙선

[1] 북한 치하 평안북도 룡천군 오흥리인데, 2004년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난 그 곳이 맞다! [2]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업적이다. 와해된 사단의 상당수를 수습하고 재정비했으며, 성공적으로 지연작전을 지휘하여 북한군의 진군 속도를 늦췄다. 이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3] 김홍일, 김석원 두 노장이 한국전 초반에 기적을 일으킨다. [4] 망명 후 3개월 후 처음으로 본국의 가족에게 서신을 전했는데 이를 전해준 사람이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이응준이었다고 한다. [5] 2013.윤상원.러시아혁명기 원동해방전쟁과 한인부대의 활약,2014.윤상원.1920년대 전반기 김홍일의 항일무장 투쟁 [6]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왕웅이란 양반이 바로 김홍일이다. 왕웅(王雄)은 김홍일이 중국에서 사용한 이름 중 하나였다. [7]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의 수준은 당시 임시정부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약을 구한다고 해도 그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그렇게 소형으로 제작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도 그런 정도의 화력의 사제폭탄을 만들려면 보통 실력으로 안된다. 백범일지에서는 중국인이 도와주었다하는데 그 정도 폭탄을 임정의 재정수준에서 기술자를 매수하고 구매할 수 있었을리 만무하다. [8]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독자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중국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진행되었다. 중국측에서는 상해경비사령부의 뤄웨이슝(나위웅, 羅為雄)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김홍일이 폭탄을 공급하며, 김구 윤봉길 등 실행책을 모집하는 등의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9] 샹가오 회전은 1941년 3월 14일~4월 9일에 걸쳐 장시성 샹가오현 일대에서 국민혁명군 제9전구 소속 11개 사단(실 전투병력 약 7만명)이 일본군 제11군 소속 2개 사단, 1개 혼성여단(실 전투병력 약 2만명)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이다. 일본군 사상자(약 5~6천명)에 비해 국민혁명군의 사상자(약 2만명)가 훨씬 많기는 했으나, 일본군은 제19집단군을 섬멸한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이 회전 도중에 일본군 제34사단은 공격 방침을 놓고 사단장 오가 시게루(大賀茂) 중장과 참모장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 대좌가 설전을 벌이다 사쿠라이 대좌가 할복을 시도하기도 했다(하지만 죽지는 않고 이후 소장으로 진급했다). [10] 참고로 대륙의 분노는 연세대 도서관에 1권 소장되어 있다. [11] 김홍일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은 독단적인 진행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가탄할 일이다"라고 명시하였다. 또한 백선엽의 자서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7일에 민기식 대령과 함께 김홍일 준장이 방문해 철수의견에 동의했지만 육본의 명령이 사수라 이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 적혀있다. 즉 이것은 백선엽 장군의 지휘경험이 소부대에 한정되어 있어서 대부대급의 지휘개념이 부족했기에 발생한 것이라 보인다. [12] 이때 전화기까지 직접 손에 들려주며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백선엽 장군의 자서전 《군과 나》). [13]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7사단, 1사단. [14] 당장 1사단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후퇴한 병력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서 재수습을 하여 부대 편제를 유지한 채 이천-용인지구에서 전투를 벌이고 이후 지연작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15]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 이동원, 군사(99) [16] 당시 채병덕이 맥아더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남한장정 200만명을 동원하여 반격하겠다고 이야기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연히 맥아더 장군이 감탄했다고 한다. [17] 수도사단, 2사단, 5사단, 7사단, 3사단. [18] 전에는 "완전히 해결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채병덕이 저지른 실책은 너무나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후 미군이 개입하고서야 확실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19] 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서 이 부분을 서술했을 때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을 언급하며 그 곳에 이 분과 같은 명장 한 명만 있었어도 남베트남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예시를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다. 당시 남베트남은 한국 이상으로 국내가 혼란스러웠으며, 국가와 군경 조직이 썩을 대로 썩었고, 군부의 쿠테타가 심심하면 발생하는, 나라 꼴이 개판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끝나긴 커넝 북베트남이 침공해서 나라를 무너뜨리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나마 이걸 막으려고 2차대전과 6.25 전쟁을 겪은 베테랑 장성들이 지휘하는 세계최강 미국이 참전했는데도 끝끝내 남베트남 스스로 정신을 못 차려서 결국엔 남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명장이 아무리 노력해도 국가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까? 실제로 1975년에 벌어진 북베트남군의 남베트남 침공 당시 남베트남 육군 18사단이 사단장이었던 다오 소장의 지휘 아래 김홍일 장군처럼 며칠 간 분투했음에도 불구, 국가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20] 저건 대담회에서 김홍일 장군의 발언이다. [21] 아마 이는 영어를 못해 미 고문관을 설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는 모국어 수준이었고, 러시아어는 간단한 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청년기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후에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어 소장을 달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22] 김석원 역시 미군과의 마찰 때문에 지휘권을 내려놓게 된다. 미군이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젊은 지휘관(특히 만주군 출신)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선엽 1사단장이 이 당시 30대였다. [23] 군사정변의 주역인 8기생들의 육사 재학시 육군사관학교장이었으며 후보생들의 엄청난 존경을 받았음을 이재전 장군 회고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8기생들이 김 장군을 외무 장관으로 위촉했다는 것이 정설. [24] 중국은 준장이 없고 소장이 별 하나, 중장이 별 두 개이다. [25] 간혹 한국군에도 5성장군, 원수가 있다는 풍문이 떠도는데 아마 명예원수 추대론이 돌았던 백선엽 아니면 김홍일 장군을 두고 착각한 듯 하다. [26] 53년 1월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대장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육군 최고 계급은 중장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중장에서 그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해군을 유독 총애했던 이승만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을 대장으로 진급시키려 했는데 손원일은 육군참모총장도 중장인 마당에 배도 몇 없는 해군에서 대장달면 시끄러워질까 염려해 이를 정중히 사양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