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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겸(1889)

파일:김호겸_비(1).jpg
성명 김호겸(金虎謙)
생몰 1889년 1월 3일 ~ 1948년 10월 2일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사망지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원서포길 46[서포리 338-8 http://gunsan.grandculture.net/gunsan/toc/GC05701893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1. 개요

김호겸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출신의 군산 옥구군 성산~나포면의 천석꾼 지주로 일제강점기에 군산 지역민 구휼과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원서포길 46[서포리 338-8]에 김호겸의 고택(김준규 주택)이 있다.

2. 생애

<일제로부터 요충지를 지키며 군산의 조선인 구휼을 하던, 군산 외 지역 출신의 군산 지주 김호겸>

1899년 5월 2일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어 조선에서 일곱번째로 개항한 항구 군산은 외국에 개방되기 전에는 크지 않은 포구였지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침탈정책으로 인해 1920년대에는 전국에서 손에 꼽는 신흥 항구도시가 되어 충청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군산으로 몰려들었다. 김호겸은 1889년 1월 3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치하로 가세가 기울어 1920년 초에 호겸은 군산의 감목 시장에서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감 장사를 시작하여 신뢰성과 성실함으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행수가 되었고 군산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군산 토착 지주와 상인들에게 신망을 얻게 되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많은 토지들이 조선에 진출한 일본 낭인들 손에 넘어갔고 한 마을에 일본 낭인 한두 명은 반드시 들어와서 조선사람을 제치고 크게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옥구군 나포면 원서포에 토색을 일삼던 지주 가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마름이 그 지주 가문의 땅문서를 금융회사에 잡혀놓은 채 만주로 도망가자 그 땅이 군산 법원의 경매로 붙여졌다. 나포는 논산, 강경, 임피, 서수, 군산, 익산 등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충청도로 통하는 요충지로 금강과 서해, 전라•충청 내륙을 하나로 이어주었고, 금강변으로 발달한 4대포구(성당포, 웅포, 나포, 진포) 중 하나로 금강-만경강 포구상권의 거점으로 강경포구 다음 가는 포구 상권이었다. 나포를 지나 진포, 군산항으로 이어졌고 금강하구 주변의 평야에서 수확한 곡식을 비롯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일제강점기의 주요 기항지 였다. 나포가 금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풍부한 수량과 쌓인 퇴적물에 의해 농업이 발달하였는데 이곳 일대의 땅이 헐값에 일본 낭인들의 손에 경매로 넘어가면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화될 것임을 간파했던 호겸은 일본 낭인을 제치고 임야의 전답을 낙찰 받았다. 당시 충남 서천에서 혈혈단신으로 군산에 와서 상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행수 호겸이 본업에 아닌 농토구입에 전재산을 사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 땅이 일본 낭인들이 주목하는 요충지인 까닭에 자신의 신변에도 위협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동아시아 최강인 일본에 개인이 대항하기엔 객관적으로 무리이다는 세계관이 대부분의 조선인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일본고위 관계자들과 어느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민을 구휼하는 방법을 택하여 살아가던 일부 토착지주들도 직접 나서지 못했다. 지주 문종구(어머니 제주고씨가 1911년 흉년에 마을 사람들에게 구휼하여 송덕비가 세워진 가정에서 자란 문종구는 비록 친일행적이 있으나 지역민 구휼활동에 앞장섰고 소작농을 두고 농장을 운영했지만 일본인 지주처럼 소작인들과 마찰을 겪지는 않았다. 나포의 십자뜰의 토지 3만 평을 농업학교로 옥구중학교에 희사하는 등 사회사업과 구휼활동으로 옥산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소수의 군산 지주 비밀연합의 “돈이 부족다하면 돈을 빌려주겠다”는 말이 이방인 출신인 호겸에게 힘이 되었다고 호겸의 후손들이 전한다. 그후 경매 낙찰에 실패한 일본 낭인은 친일세력을 앞세워 땅을 뺏기위해 집요하게 압박 했다. 이후 일본 좌등과 친일세력들은 일제 말기까지 그를 음해하는 세력으로 활동하여 구치소로 연행 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등의 핍박을 했지만 피나는 노력과 뜻있는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농업과 상업을 병행하여 옥구군 성산~나포면의 천석꾼 지주가 되었다. “다 죽어가는 굶주린 자들도 기어서라도 호겸의 집에 가면 살수 있다”하여 김호겸의 집 문 앞에 각지에서 온 굶주린 자들의 행렬이 허다 하였다. 1927년 김호겸-김재길 부자가 옥구의 서수농민 항일 항쟁 시 식량을 지원하였는데 호겸의 곳간의 열쇠를 살짝 따놓아 서수 소작민들이 그 식량을 가져가게 두었어도 항시 호겸의 집 앞과 행랑채에 구휼미를 얻으려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기에 눈에 띄지 않아 경찰에게 들키지 않았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서수농민 항쟁 이후에도 소작인들의 노력에도 강제진압을 당하고 삶이 나아지지 않은채 쫒겨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호겸의 구휼이 지역민의 목숨을 살리는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군산지역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수탈과 억압을 받았기에 이들을 구휼하기 위한 소수의 지주로 구성된 조직이 만들어 지기도 했고, 감시로 인해 조직활동을 못하게 되자 각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의 통계를 보면 군산부의 토지 중에 80%가 일본인들의 소유였으나 비옥한 농토가 많았던 옥구 지역의 경우는 40%가 조선인의 소유였는데 김호겸의 옥구군 성산~나포면 일대의 토지를 소유하여 일제의 수탈에 고통 받는 지역주민들에게 구휼을 한 것이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 육영사업에 앞장서 민족의 인재양성에 귀감 >

호겸은 성산~임피~나포면 일대의 아기를 난 집에 광목 한 필, 미역 한 톳, 쌀 한 말을 베풀었고 성산(당시 옥구군 나포면~성산면 일대)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프 마라톤 등 체육대회를 자비로 개최 하였으며, 성산초등학교(성산 공립 보통학교 1923. 06. 01. 개교)와 나포초등학교(나포 공립 보통학교 1935. 04. 15 개교)에 풍금을 기증하는 등 육영사업에 앞장서 민족의 인재양성에 귀감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중일전쟁을 위해 조선의 공출미 수탈에 혈안이 되자 지주 계급들에 대한 압박 강도가 높아졌다. 지주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양식 외에는 식량을 전부 공출 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친일이 아닌 자에게는 더욱 엄격하였다. 그런데 호겸은 지금까지 벌여놓은 지역민들에 대한 교육, 구제, 적선을 그만두지 않고 지속하여 더욱 일제의 눈엣 가시가 되어 일본 앞잡이들의 투서, 음해 등으로 인한 잦은 유치장 행 등 갖은 핍박을 감내했다. 당시의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지게만 다닐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신작로를 뚫기 시작하여 신작로 길을 이용하여 공출 이외에 쌀을 사적으로 판매하면 일본순사에게 적발되게 하였다. 호겸은 기존에 벌여놓은 육영사업에 돈이 필요하자 한밤 중 몰래 서포 포구에서 조그만 배를 이용하여 나락을 군산으로 실어내 육영사업비를 만들곤 하였는데, 일본세력에 넘어갈 땅을 지킨 호겸이 ‘최소한의 양식 외에는 전부 공출’을 하지 않고 조선인에게 교육, 마라톤 대회, 구휼을 베풀자 더욱 못마땅했던 일본인과 친일지주 등 일본세력은 호겸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여 1943년 호겸을 군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하였다. 호겸의 조력자들에 가혹한 취조를 하였지만 일의 전말을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호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호겸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지병을 얻게 되었고 그의 집 앞마당이 일본군의 군마를 기르는 곳이 되는 등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구휼과 육영사업에 힘을 쏟았다 1948년 10월 2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역사회에 봉사하였다. 6.25 동란 때 농민들에게 원한을 산 지역의 지주들은 죽임을 당하곤 했지만 호겸과 그의 식솔, 그의 재산은 온전하였다. 큰며느리 조배영은 올해 99세로 현재 그 고택에서 셋째 며느리가 매주 정성 들여 만든 영양식과 셋째 아들의 봉양을 받으며 시아버지 김호겸의 삶을 증언 하곤 한다. “밥상에 고추장 한 숟가락 찍을 만큼만 놓아 절약을 했으며 지주여도 도자기, 골동품, 금붙이, 장신구, 비단옷 한 점이 없었다.” 옆에서 시아버지를 도왔던 맏며느리는 이렇게 절약하여 모은 재물로 시아버지가 지역민에 대한 육영사업, 구제를 하였노라고 추억한다. 군산시 나포면 서포리에 위치한 그의 묘에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있다.

3. 평가

일제강점기 군산의 대부분의 지주들이 친일세력이었지만 군산 임피의 독립운동가 춘고 이인식 선생처럼 전재산을 독립운동으로 헌납한 부호 또는 지역민 구휼, 민족계몽에 인생을 바친 소수의 지주들이 있다. 악덕지주와 지역민에게 희생했던 지주와는 철저히 구별해야 함에도 이들의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오거나 자료가 정리되지 않은 까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진실들이 소멸하는 경우가 많아 조속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군산 출신이 아님에도 1920년대~1940년대 일제로부터 군산의 요충지를 지키며, 군산 지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충남 서천 출신 지주 김호겸을 조명하는데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지주 김호겸 뿐만 아니라 지역민 구휼, 민족계몽에 인생을 바친 지주였음에도 이름도 없이 일제 앞잡이 지주와 함께 악덕친일세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이들이 있다. 이름도, 행적도 세월에 지워지기 전에 지역민에게 희생했던 그들이 삶이 조명되어야 한다.

4. 기타

4.1 김호겸은 근대적인 제조업에 눈을 떠 현대적인 비누공장을 설립했다. 이는 럭키화학 보다 10 년 앞선 것으로 6.25 전까지 비누공장을 운영하였는데 6.25시 폭격을 당했는데 군산 옛 구시장 일대에 비누공장 잔재가 있다.

4.2 김호겸 생가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서포리 원서포 마을에 있는 근대 초기의 주택.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위치]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원서포길 46[서포리 338-8]
[개설]
김호겸 고택(현 김준규 주택)은 근대 초기에 건립된 부농 주택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안행랑채, 사랑채와 사랑행랑채가 쌍ㄷ자 형태로 배치된 주택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근대 초기까지 군산 지역 주택 건축의 평면 및 공간 구성의 특징과 창호의 변화 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2동의 행랑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충분한 공간적 여유를 가진 부유한 농가 주택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형태]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의 행랑채를 갖는 형태로 4동의 건축물로 구성된 주택이다. 안채는 정면 7칸의 一자형 건물로 평면은 좌측으로부터 부엌 2칸•안방 2칸•대청 1칸•건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낮은 시멘트 기단에 사각형 초석을 앉히고 민흘림 사각 기둥을 세운 후 장여수장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목조 가구는 2고주 5량가이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안방과 건넌방 뒤쪽에는 고방과 벽장을 둔 전후 툇간형의 평면이다. 대청 뒷면과 건넌방의 우측면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부엌의 천장 일부에 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벽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근래에 부엌을 뒤쪽으로 덧달아내어 증축하였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여닫이 굽널띠살문과 미닫이 아자살문의 겹문을 달았다. 대청에는 미닫이 유리문을 달고, 툇마루에는 근래에 알루미늄 창호를 설치하여 내부 공간화 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7칸의 一자형 건물로 평면은 좌측으로부터 벽장 1칸•안방 2칸•대청 1칸•건넌방 2칸•툇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낮은 시멘트 기단에 원형 초석을 앉히고 민흘림 사각기둥을 세운 후 장여수장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목조 가구는 2고주 5량가이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건넌방 뒤쪽에 벽장을 둔 전후 툇간형의 평면이다. 건넌방 우측면에도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건물로 부엌은 따로 없고 난방을 위해 안방 옆의 벽장 아래와 건넌방 뒤쪽의 벽장 아래에 아궁이를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쌍여닫이 띠살문과 미닫이 아자살문의 겹문을 달았고, 대청에는 사분합 굽널띠살문을 달았다. 안채에 부속된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로 평면은 정면에서 좌측으로부터 광 1칸•대문 1칸•헛간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측면에서 헛간 2칸•마루광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에 부속된 행랑채의 지붕은 맞배지붕인 솟을대문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우진각 지붕이다. 사랑채에 부속된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로 평면은 정면에서 좌측으로부터 헛간 1칸•대문 1칸•광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측면은 모두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 부속된 행랑채는 우진각 지붕이다. 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에 각각 별도의 ㄱ자형 행랑채를 결합한 배치가 김호겸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김호겸 고택은 근대 초기까지 군산 지역 주택에서 일반적인 一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방과 부엌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수장 공간이 발달하면서 전후 툇간형의 평면을 형성하는 겹집화의 경향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사용된 부재는 모두 곧고 반듯하며, 구조 형식은 견실하다. 넓은 수장 공간으로 구성된 2동의 행랑채는 각각 그 목적에 따라 격을 낮추어 지었다.

[여담]
- 김호겸의 자손은 춘천 지방법원장, 판사, 검사, 변호사, 병원장, 교수 등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인재가 다수 배출되어 봉사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 김호겸 고택은 김호겸의 며느리 조배영과 그녀를 셋째 아들 김준규가 봉양하고 있는 가정집이다. 관광지가 아님에도 풍광이 좋은 탓에 여러 관광객들이 김호겸 고택 앞 풍경을 소재 삼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 촬영하는 등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자연풍광을 보면 공기가 맑을 것이라 여겨 마스크를 벗는 이들이 있는데 근처에 서해안고속도로와 휴게소, 주유소가 있어 공기의 질은 결코 좋다 할 수 없다. 또한 현재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에 감염되는 돌파감염이 늘고 있으므로 가정집인 이곳에서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 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에 각각 별도의 ㄱ자형 행랑채를 결합한 배치가 김호겸 고택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 고택은 군산지역의 옛 기와시공 방식을 구현하는 작업을 통해야 이 고택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한다. 1990년대 말을 끝으로 이러한 장인을 군산 내에서 구할 수 없어 전국의 기와 장인에 의뢰하여 매년 기와지붕을 수리했지만 매번 허사였다고 한다. 지붕공사 후 기와가 떨어지는 것은 예사로, 기존 서까래와 한 살이 되지 않아 거금을 들여 기와지붕 공사를 마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붕이 주저앉는 일을 겪은 뒤로 대대적인 기와지붕공사를 지양하는 중이라고 한다. 여전히 이 고택에 맞는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장인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며, 그 전까지는 소소하게 수리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경험에 근거한 판단하에 국소부위의 수리만을 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