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1:38:27

김판근

김판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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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이영진
(1994)
김판근
(1995~1996)
고정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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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78365277.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김판근
金判根|Kim Pan-Keun
출생 1966년 3월 5일 ([age(1966-03-05)]세)
전라남도 해남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 은퇴)
축구 감독
학력 송지중학교 (졸업)
광주북성중학교 (졸업)
금호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83 / 학사)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대우 로얄즈 (1987~1993)
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1994~1997)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1998~2001)
감독 BSP 유스 아카데미 (2001~ / 총감독)
국가대표 51경기 3골 ( 대한민국 / 1983~1996)

1. 개요2. K리그 데뷔 전3. 대우 로얄즈4.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5. 호주 리그6. 국가대표 경력7. 은퇴 이후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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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역사상 최연소 데뷔 선수 기록의 보유자이자 1983년 FIFA 청소년 선수권 4강 신화의 주역이다.

아들 대니 킴이 싱가포르 무대에서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2. K리그 데뷔 전

전라남도 해남 출생으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 꽤 잘되어 그 시대에는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당시 TV가 귀했던 시절, 이러한 환경의 덕으로 김판근은 집에서 분데스리가를 누비는 차범근의 모습을 보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더 큰 곳에서 축구를 배우고 싶어 했고 결국 집안의 허락을 받아 해남 송지중학교에서 광주 북성중학교로 전학을 간다.

북성중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북성중 축구부에서 뛰게 된 김판근은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 3학년때 전남 도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가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전라도에서 가장 축구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인 금호고등학교에 스카웃되었다. 여기서 그는 1학년때 처음으로 벤치생활을 경험하게 되고, 자존심이 상해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고. 그러나 감독의 만류로 잔류해 2학년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까지 한다. 이때가 그 유명한 1983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4강 신화를 이룬 그 대표팀이다.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어 청소년 대표에 선발된 그는, 신연호, 이기근, 김종부, 노인우 등과 더불어 당시 대표팀의 핵심멤버로 활약했고, 멕시코 대회에서 대표팀이 치른 6경기에 모두 출전해 대표팀의 4위에 큰 기여를 한다. 당연히 당시 내로라하는 축구 명문 대학교들의 1순위 스카웃 대상이 되었고, 그는 축구 명문 고려대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1987년 졸업을 하고 K리그에 입성하게 된다.

3.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며 화려하게 K리그에 입성한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입단 첫 해부터 리그 30경기에 나와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했다. 입단 첫해 대우의 리그 첫 우승까지 달성했다. 1988년 올림픽 상비군으로 계속 차출되며 리그 3경기 출전에 그친 것을 제외하고는, 매 시즌마다 그는 대우의 주전이었고, 1993년까지 167경기 11골 14도움이란 기록을 남기며 1987년, 1991년 리그 우승, 1990년 리그 준우승 등 화려한 프로생활을 보낸다. 오른쪽 측면 윙백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재능도 좋아, 한 시즌에 2~3골은 꼭 기록하는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1994년 그는 당시 서울이 연고지던 LG 치타스로 전격 이적하게 된다.

4.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1994년 LG 유니폼을 입고부터는 조금 더 수비적인 포지션에서 뛰게 되었다. 예전부터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출신이었지만 30대를 향하던 때라 스태미너의 저하가 불가피했고, 원래 여러 포지션을 볼 수 있던 김판근은, 이때부턴 수비형 미드필더 위주로 경기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측면 윙백처럼 중앙 지역에서도 그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며 1995년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LG에서 4시즌간 100경기 2골 7도움으로 여전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30대 중반으로 향하는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풍토였고, 김판근은 선수 생활 은퇴를 계획하며 간 호주 여행에서 우연한 기회를 얻게 된다.

5. 호주 리그

1997년 그는 시즌이 끝나고 지인의 추천으로 호주여행을 가는데, 이 곳에서 개인운동을 할 곳을 소개받아 홀로 운동을 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호주에서 가장 큰 팀 중 하나였던 마르코니 스탤리언스란 팀에서 훈련시설을 쓸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김선수의 운동능력을 보고 마르코니 측에서는 이적제의를 했고, 꽤나 진지한 제안에 김판근도 은퇴 대신 호주행을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호주 국내리그의 수준은 K리그와는 차이가 많았던 시절, 김판근은 30대의 나이에 호주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팀의 주전으로써 구단 지면 광고모델도 하는 등 팀의 간판스타로써 활약했다. 이 4년간의 경험이 김판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고 하는데, 축구실력과는 별개로 선진적인 훈련시스템과 유소년 시스템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김판근은 2001년 선수 은퇴후 곧바로 호주에 김판근 축구센터를 차려 유소년 축구 유학 사업에 뛰어든다. 이 때 김판근 축구센터 1기 학생으로 호주 유학을 왔던 선수가 기성용이다. 당시 브리즈번에서 가장 큰 축구센터로 성장할만큼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6. 국가대표 경력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3년,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 멤버로 귀국한 이후, 1984 LA 올림픽 지역예선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대표팀에 선발되어 1983년 11월 1일, 태국전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이 때가 만 17세 242일의 나이였다. 놀랍게도, 김판근은 이해 1차예선에서 주전으로 뛰었고, 이듬해 열린 최종예선까지 주전급으로 활약하며 국가대표팀의 허리진에 큰 힘이 된다.

이후 A대표팀보다는 1988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올림픽 대표팀 위주로 합류해 A매치 기록은 1987년에서야 다시 쌓였다. 1987년 6월 10일 희대의 몰수무 경기였던 이집트와의 경기에 출전했기도 했다. 이후 88올림픽 대표팀에서 밀리며 다시 한동안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고, 1990년 월드컵이 끝난 이후 다시 국가대표팀에 합류한다. 이때가 김판근의 국가대표팀 커리어의 전성기로, 그는 1990 아시안게임부터 1994 FIFA 월드컵 본선까지 김호 감독 체제에서 줄곧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1993년 이라크와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는 오래간만에 골도 넣었다.

박종환 감독이 94 월드컵이 끝나고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1983년 박종환 감독과 함께 4강 신화의 주역이었던 김판근도 자연스레 계속 대표팀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1996 AFC 아시안컵에서 8강 참패를 당하면서 박종환 감독은 경질되고, 이후 김판근은 선수 은퇴까지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A매치 통산 59경기 3골을 기록했다.

7. 은퇴 이후

호주 브리즈번에서 축구센터와 함께 정착하여 현지에서 아들 대니 킴을 낳았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축구를 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하지만, 아들 또한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결국 브리즈번 로어 유소년팀에서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해 지금은 브리즈번 로어 선수로써 프로축구 선수의 삶을 살고 있다.

2014년부턴 채석장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판 글로벌이라는 사업체를 국내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베트남, 중국, 터키 채석장과 거래를 하며 사업이 꽤나 잘 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인터뷰에선 제주에 18층짜리 호텔 건물을 올려 영업하고 있다고. 코로나 이전까지 굉장히 사업가로써 성공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코로나 이후의 근황은 밝혀진 것이 없다.

8. 여담


* 호주 리그에 진출했던 이후 호주에서 꾸준히 사업을 하면서 제 2의 거처로써 정착했다. 아들 대니 킴 (한국명 김형준)은 한국계 호주인으로서 호주 국내 선수 자격으로 A리그 브리즈번 로어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 2016년, 대구에서 김판근을 사칭해 대구 일대 화장품가게를 돌며 수백만 원을 사기친 자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당시 축구계를 떠나 있던 김판근씨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어 이를 계기로 근황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 현역 시절 체구가 호리호리하면서도 볼을 영리하게 잘 찼던 유형의 선수로, 센스있고 재치있는 플레이를 보여주어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