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21 09:40:13

김천록

1. 개요2. 생애


金天祿
(? ~ ?)

1. 개요

고려의 무신.

2. 생애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김방경의 휘하 장수로 종군한다. 12월에 원나라에서 파견한 원수 아카이와 김방경 등의 배가 진도에 이르렀는데, 김방경은 머뭇거리는 아카이를 두고 먼저 적진으로 돌입한다. 이윽고 김방경의 배는 삼별초의 배에 포위됐고, 전투를 거듭한 끝에 선내에는 화살과 돌이 떨어지고 화살을 맞은 부상병만 가득하게 된다. 김방경의 배는 진도 해안까지 밀려나고 삼별초군 병사들은 칼을 빼들고 선내에 돌입하는데, 김천록이 단모(短矛, 짧은 창)로 삼별초군을 받아치며 분투한다. 김천록의 뒤를 따라 창병들이 일어나 치열하게 싸우고 장군 양동무가 몽충선을 끌고 오니 삼별초군의 포위는 풀리고 김방경 이하 병사들은 진도 해안에서 탈출한다.

원종 15년(1274) 10월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종군한다. 도독사 김방경이 중군을 이끌고 지병마사 박지량, 지병마사 김흔, 부사 임개가 중군에 있었는데, 김천록 역시 중군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합군은 일기도에 이르고 언덕에서 진을 친 일분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뒤 배를 포구에 둔 채 길을 나눠 섬 안으로 진둔한다. 고려군 중군은 좌우에서 장검을 교차한 채 돌격하는 일본군을 맞아 전투가 벌어지는데, 김천록은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 신혁 등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대승을 거둔다. 원나라의 도원수 쿠둔이 회군을 명해 연합군은 합포로 돌아가는데, 이 밤에 큰 비바람으로 인해 다수의 함선이 파손되고 익사자도 나온다.

충렬왕 3년(1277) 김방경이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에게 무고를 당할 때 김천록의 이름도 참소문에 오른다. 김방경이 자기 아들과 사위에 더해 공유, 나유, 안사적, 김천록 등 400여명과 왕과 공주( 제국대장공주), 다루가치 석말천구를 죽이고 강화도로 들어가려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김방경은 그 외에도 여덟 항목에 따라 참소된다. 힌두와 석말천구, 충렬왕이 김방경 등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위득유와 노진의가 무고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김천록은 돌아보며 둘을 꾸짖는다.
너희들은 개돼지다! 진도를 공격할 때 너희 두사람이 군율을 범했는데 중찬(中贊, 김방경)께서 너희들의 장물을 몰수해 관아에 속하게 했으니, 너희가 원한을 품은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 없는 말을 꾸며내고 대신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하늘이 (너희를)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이 없는 것이리라![1]

김복대가 사실을 밝히니 김방경은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김천록을 포함한 한희유 등 12명은 병장기를 숨긴 죄는 있었으므로 장을 맞고 석방된다. 이후 원나라에서 홍다구가 와서 재차 국문한 뒤 김방경에게 고문을 가하는데 김방경과 김흔만 유형을 받고 나머지가 석방되는 것은 전과 같았다.

충렬왕 6년(1280) 왕이 원나라에 상서를 올려 진도, 탐라, 일본에서 전공을 세운 군인에게 상을 줄 것을 청할 때 김천록의 이름이 보인다. 총관, 천호, 총파[2]의 벼슬을 청하고 있는데, 김천록 등 20명은 총파에 임명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20명 중에는 일본 원정에 함께 참전했던 이당공, 위득유의 참소를 무고라고 밝힌 김복대 등이 있다.


[1] 汝等犬豕也. 攻珍島時, 汝二人犯律, 中贊沒汝贓入官, 汝所憾者此耳. 今飾虛辭, 欲陷大臣, 天而不誅, 無天也. [2] 『고려사』에서는 병사 1천명당 총관과 천호를 한 명씩, 총파는 두 명씩 둔다고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