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룡 金俊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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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86년 |
사망 | 1642년 (향년 54세) |
자 | 수부(秀夫) |
시호 | 충양(忠襄) |
본관 | 원주 김씨 |
부모 | 부친 - 김두남(金斗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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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신.2. 생애
1586년 태어났으며 1608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거쳐 황해도·경상도, 함경도의 병영에 근무하였다. 1617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1628년에는 황해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북병를 거쳐 1636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감사 이시방과 함께 근왕군을 결성해 관할 군사를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면서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병력을 보강하였다. 대부분 조총병으로 구성되었고 선봉 2,000명을 이끌고 직산을 경유해 용인의 광교산에 서 포진했다. 일반적인 조총병보다 많은 화약과 탄환을 지급했다.
청나라 군대 수만이 공격해오자 계곡에서 포위해 화망을 형성했고 김준룡을 포함 모든 군관들이 전방에서 사격통제했으며 전투 당시 안개가 껴 시계가 제한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훈련이 부족한 조선군의 사격통제에 큰 도움이 됐다.
한나절이 넘도록 필사적으로 싸워 청군을 저지했으며 청 태조의 부마 슈무루 양구리가 산을 우회하자 별동대를 편성해 등 슈무루 양구리를 포함한 청군을 사살했고 이에 청군이 퇴각했다.
하지만 화약이 바닥났고 근왕군 총지휘관 전라감사 이시방이 보급에 실패해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탈영하며 근왕군이 와해되어 휘하의 기병 수백을 이끌고 수원에 도착, 다시 남하하여 재기를 계획하였다.
전후 적전도주 누명이 씌어져 유배되었으나, 이성구, 최명길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후 어영중군, 김해부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정조때 그의 활약이 재평가되어 충양이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