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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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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 |
1945년 양평 남한강가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모자 쓴 사람이 김용기, 맨 우측이 여운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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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容基, 1909년 9월 5일 ~ 1988년 8월 1일대한민국의 개신교 농촌운동가. 본관은 신 안동(新 安東)[1], 호는 일가(一家)다.
2. 일생
1909년 9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초부면 봉안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2]에서 아버지 김주현(金柱顯, 1869. 8. 21 ~ 1925. 5. 27)과 어머니 경주 김씨(1874. 12. 19 ~ 1954. 8. 4) 김교석(金敎錫)의 딸 사이의 5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운형이 경기도 양평군에 세운 광동학교를 졸업했고 여운형을 스승으로 모셨다.경기도 양주군 와부면(현 조안면) 능내리에 봉안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출옥한 여운형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55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현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여 농촌 일꾼을 양성해 196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고 새마을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988년 8월 1일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 풍산리 제1가나안 농군학교 내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
- 개신교 신자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생전에 '성령의 불길'이란 찬양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참참참 피 흘리신'이라고도 한다.
- 평소 인민복을 자주 입고 다녔는데 당연히 관계 기관에서 '빨갱이 옷'이라며 입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김용기는 '김일성 이전부터 존재한 옷'이라고 일축하며 계속 입었다. 사실 관계 기관에서 내린 경고가 웃긴 게 당시 한국 경찰의 제복과 육군 사병 정복이 인민복 스타일이었던 데다 가나안 농장 설립 당시와 같은 시기에 정부에서 제정하여 국민들에게 권장했던 국민복과 국민학생, 대학생 교복이 이런 형태였다. 더군다나 인민복이 중화민국 시절의 중국에서 공식 복장으로 지정되었던 데다 장제스와 장징궈도 인민복을 입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웃긴 일이었다. 심지어 인민복 항목에 나오듯이 박정희도 비슷한 옷을 입었고 이처럼 한국 정부요인들도 비슷한 걸 입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당시 관계 기관도 이걸 가지고 김용기에게 더 뭐라고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