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2:49:52

김성근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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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실제 사례3. 원인
3.1. 김성근 감독의 혹사
3.1.1. 긍정론3.1.2. 부정론
3.2. 김성근 청산 과정의 혼란3.3. 해당 팀 자체의 문제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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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야구 엘지(LG)는 올해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9시즌 연속이다. 팬들 사이에선 “김성근 감독을 다시 모셔오자”는 말이 나온다. 일종의 ‘결자해지’ 해법이다. 엘지는 2001년 5월, 9승1무25패로 부진했던 이광은 감독을 경질하고 김성근 2군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김 감독은 이듬해 엘지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엘지 구단은 김 감독을 해임했다. 그 뒤 엘지는 ‘가을잔치’에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2003년부터 올해까지 6→6→6→8→5→8→7→6→5위를 했다.

- 김동훈, ‘김성근의 저주’를 아시나요, 한겨레, 2011. 09. 29.

김성근 감독이 맡았던 팀은 김성근이 물러난 이후 성적이 추락한다는 것을 일컫는 말. 본래 이 말이 유래하였던 것은 2002년 준우승을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을 쫓아낸 LG가 2003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일명 비밀번호를 찍던 시절 나온 도시전설 같은 내용이었다. 실제로 사례들을 살펴보면, 김성근이 맡았던 팀은 대부분 그가 나가고 나서 후임 감독 시절에 성적이 더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만 이 말이 처음 나오던 시점까지만 해도 김성근 감독의 SK 와이번스 왕조 시절이었던 만큼 일종의 도시전설 내지는 2002년 당시 막장으로 유명했던 LG 프런트를 까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던 반면, 한화 이글스에서의 실패 이후 그간 김성근 감독의 행적이 재조명되면서 오히려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기 위한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해당 문서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기반하여, 해당 문제를 김성근이란 인물의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문제로 원인을 서술한다.

2. 실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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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구단별 구체적인 사례 및 설명에 대한 내용은 김성근의 저주/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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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원인

3.1. 김성근 감독의 혹사

3.1.1. 긍정론

김성근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안 남는다.
감독 김성근. 구단 모기업 부도로 존속 자체가 불투명했던 쌍방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팀이 김 감독이 떠난 1~2년 후 암흑기를 맞아 선수단 리빌딩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당시 김 감독 야구의 '투수 총아'들은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쉽지 않은 야구 인생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 김성근 야구 '에이스' 총아인가 제물인가

김성근은 대한민국 야구계를 대표하는 윈나우 성향 감독으로, 성적을 내기 위해 구단을 최대한 쥐어짜내는 극단적인 윈나우 스타일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리빌딩 개념이 희박하던 과거에는 약팀을 맡아 성적을 냈다는 점에서 리빌딩형 감독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김성근이 나간 뒤 팀이 휘청대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야구적 관점에서는 틀린 지적이며, 오히려 현대야구적 관점에서는 올드스쿨 윈나우형 감독으로 분류된다.

사실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의 능력적 문제가 아닌 스타일상의 문제에 가깝다. 김성근이 한화를 맡을 당시에는 이런 문제로 매우 큰 비판을 받았으나, 감독의 여러 가지 스타일에 대한 논의가 더 이루어지고 김성근이 한화를 떠난지 시간이 지나서 부정적 감정이 누그러진 현재는 단순한 김성근 야구의 승리지상주의 스타일의 결과로 보는 의견이 많아졌다. 당장 김성근이 언플로만 본인을 치장한 완전히 무능한 인물이었다면 벌떼야구라는 독특한 투수 운영을 하며 SK를 전성기로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며, 약팀을 맡아 전력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20년대 현재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카고 컵스, 텍사스 레인저스, NPB는 현재의 히로시마 카프나 닛폰햄 파이터즈, 한국은 2010년대 후반의 삼성 라이온즈 등 열심히 영끌해서 대권도전을 한 팀들은 화려한 전성기가 지나고 나면 암흑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김성근의 윈나우 스타일은 이미 김성근 본인의 임기 중에 영향이 나타날 정도로 그 그림자가 강하다는 측면이 있다. 김성근이 감독을 맡았던 팀들의 성적을 보면 2010년 SK 와이번스를 제외한 모든 팀이 공통점이 첫해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후, 해당 순위를 유지하거나 점차 떨어지는 특성을 보인다. 평균자책점 또한 1986년 OB 베어스, SK 와이번스 시절[1]을 제외하면 모두 전년도보다 올라가는 양상을 보였다. 즉 부임 첫해에 선수들을 쥐어짜서 좋은 성적을 내지만, 이내 그 후유증으로 차차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투수진 역시 역시 쥐어짜기 운영으로 첫해에는 나름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만, 바로 다음해부터는 후유증으로 투수들의 구위가 모두 떨어지고, 돌아가면서 부상으로 이탈하기 때문에 점점 무너진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서 참조.

3.1.2. 부정론

애초에 김성근이 한 팀을 오래 맡은 케이스가 OB와 SK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2년 수준으로 그리 길지 않다. 그나마 3년차를 이어간 팀인 쌍방울은 1998년 당시 재정난으로 이미 굉장히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이 맡으면 혹사로 점점 성적이 떨어진다는 부분은 섣부른 판단이 어렵다. 반대로 장기 집권을 보장했던 OB와 SK 모두 각각 3년차와 4년차에 성적이 올라가는 예외 사례가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김성근 감독을 믿고 계속 갔다면 오히려 성적이 더 상승했을 수 있을 거라는 역해석도 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보통 감독들 대부분이 어느 시점까지 팀을 장악하면서 성적이 올라간 다음에는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수준의 성적을 낸 후 성적이 떨어지면 바로 숱한 비난을 받고 경질되거나, 아니면 애초에 처음부터 성적을 못 내서 얼마 안 가 경질되는 것이 한국의 프로야구 감독들이다. 전체를 통틀어도 감독 대행을 제외하고 총 123번의 감독 교체가 있었으나, 이중 어느 한 구단이라도 4년 이상 감독을 역임한 인물은 17명에 불과하다.[2]

즉 이러한 철퇴를 피할 수 있었던 감독은 리그에 신규 진입하여 아직 성적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팀들, 아니면 의외의 우승 및 호성적을 내면서 조금이라도 더 믿어보자는 기대를 주었던 감독들 정도만이 살아남았고, 그 외에는 해태의 터줏대감이었던 김응용, 전통적으로 감독 경질을 선호하지 않았던 OB-두산의 김인식, 김경문, 김태형, 그리고 비슷한 성향이었던 빙그레-한화의 김영덕, 김인식 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김성근에 대한 통계만 보면 그럴 듯해보이는 내용이지만 전체 감독들의 성적 추이를 보면 감독 대부분이 그 길을 겪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김성근 혹파의 역사, 김성근의 저주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모든 감독은 팀에 저주를 내리고 있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혹사 이야기를 하지만, 1980년대부터 심지어 많이 나아졌다는 지금까지조차 혹사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감독은 없다. 김성근의 사례가 유달리 심하다고 포장되지만, 정작 한화 이글스 이전까지로 한정한다면 딱히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태평양 3인방의 혹사가 자주 이야기되지만 정작 해당 시즌 200이닝을 넘은 선수 순위는 윤학길(롯데)-박정현(태평양)-김성길(삼성)-최창호(태평양)-김청수(롯데) 순이다. 반대로 이닝 20위 내에 든 선수는 해태가 5명으로 많다. 즉 특정 선수에 대한 혹사로 보면 롯데 어우홍, 팀 전반에 대한 혹사로 보면 해태 김응용의 혹사가 더 심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이후 김성근 감독이 시즌을 소화할 때마다 마찬가지였다. 1991년 삼성 김성길에 대한 혹사도 많이 이야기되지만 경기 수가 1위일 뿐 정작 당해 이닝 소화는 8위이며, 오히려 김성근이 물러난 태평양의 최창호, 정명원이 이닝 수, 경기 수에서 압도적인 혹사를 당했다. 1992년에는 아예 이닝 10위권에 삼성 선수가 없는 수준. 1996년 쌍방울 또한 이닝 수 10위권 내에 어떤 선수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며, 경기 수(구대성)와 이닝 수(정민철) 최다는 모두 빙그레 선수들이 기록했다. 1997년 김현욱의 압도적인 경기 수가 부각되었지만 정작 이닝 수는 157이닝으로 7위였고, 해태 임창용 또한 그 못지 않게 굴렀던 시즌이었다. LG 시절 또한 선발, 불펜 모두 당시 SK 강병철 감독의 혹사가 더욱 심했다. 2007-2011 SK 왕조 시기의 기록도 2009년 전병두 정도를 제외하면 타 팀 불펜보다 기록이 딱히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

그러나 당시 김성근보다도 선수들을 혹사시켰던 어우홍, 김응용, 박영길, 강병철은 그저 올드 스쿨 감독이라고 이야기될 뿐 정작 혹사 감독으로의 주목을 크게 받지 않았으며, 후임으로 왔던 감독들 또한 이광환 정도가 독특한 케이스일 뿐 박영길, 우용득, 이만수 모두 상당한 혹사 기록을 저질렀다. 이런 혹사 논란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자율 야구의 대부격인 이광환, 그리고 잠시 혹사가 있었으나 팀 상황이 최악인 것을 보고 아예 시즌을 포기하고 그 흐름을 끊었던 정동진 정도.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의 혹사에만 다들 주목하고 그것이 팀을 망쳤다고 평가할 뿐, 이러한 혹사가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전혀 이뤄지지 못하였다. 결국 통계에서 어떤 부분을 더 주목해서 보느냐의 문제이다. 김성근 감독의 혹사가 굉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중 김성근 감독의 혹사가 더 드러나는 지점만 바라보았을 뿐 당시 전체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며 김성근 감독의 혹사가 타 감독보다 정말 더 심했는지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성근 감독의 혹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며, 김성근이 맡았던 팀의 미래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주었던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성근이 팀을 맡았던 기간은 OB, SK 정도를 제외하면 2년 남짓으로 단기간이었고, 정작 가장 오랜 시간 집권했던 SK의 암흑기는 2년이나 이후인 2013년에 나타났다. 반면 1년 반 남짓 맡았던 LG의 암흑기는 장장 10년에 걸쳐 일어났던 것. 즉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김성근의 잘못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사례들이 다양하고 경우의 수가 다양하며, 단순히 이 문제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3.2. 김성근 청산 과정의 혼란

대표적으로 OB 베어스, SK 와이번스 등 김성근 감독이 장기 집권하거나 태평양 돌핀스 등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장악한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3] 김성근 감독의 윈나우나 혹사보다는 감독 중심의 관리 야구가 문제가 되어서 발발한 케이스를 말한다. 보통 김성근 감독과 충돌한 프런트에서 다음 감독으로 지목하는 케이스는 돈이 없어서 무너진 쌍방울 정도를 제외하면 전형적인 김성근 반전 버전인 경우가 많았다. 신바람 야구, 막걸리 야구 등 다양한 말로 포장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빅볼 중심, 자율 야구 추구, 신인 중심 리빌딩으로 대표되는 것. OB와 LG 시절의 후임이었던 이광환, 태평양 시절의 박영길, 삼성 시절의 우용득, SK 시절의 이만수 모두 같은 케이스이다.

실전은 게임처럼 감독 바꾸면 바로 선수들이 그에 맞춰 성적을 내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선수단 입장에서 전임 감독이 별 실권 없이 팀 장악에 실패한 경우라면 환영받을 수 있지만, 전임 감독의 영향이 크면 클수록 악영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팀 장악에 실패했던 삼성 때는 유일하게 이 방향이 환영받았고 우용득 감독 또한 첫해 준우승이란 성과를 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나마 성적이 좋았던 2012년 이만수조차도 초반 SK답지 않은 6위까지의 추락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2013년부터는 암흑기로 이어졌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에 대한 호불호는 사람마다 크게 갈리지만 혹사당한 선수들조차도 존경을 표할 정도로 선수단에 대한 장악력은 김응용과 함께 투탑을 달렸던 만큼 당연한 것.

심지어 단순히 감독 쳐내기에 그쳤다면 그나마 좀 나을 수 있었지만, 해당 조치는 리빌딩이라는 명목 아래 김성근 색채 지우기, 그리고 김성근이 중용했던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정리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이는 김성근이 데려온 선수들뿐 아니라 팀 프랜차이즈들에 대한 정리로까지 이어졌는데, 대표적으로 LG는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 장문석을 정리하는 등 가장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다. 실제로 경질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었던 삼성조차도 당시 활동하던 일부 선수들이 리빌딩의 강도가 너무 강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노장 선수들의 부재가 팀 단합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러한 ‘김성근의 저주’의 기저 원인에는 단순히 김성근 개인의 이탈 이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가장 가까운 사례인 한화 이글스 또한 마찬가지다. 한화는 전통적인 고령화 구단이며, 김응용-김성근 감독 시절 FA를 대거 영입하기는 하였으나 외부 FA 영입이 극단적으로 적었던 구단이었다. 여기에 베테랑을 선호하는 김성근 감독의 특성상 은퇴 시즌에 있는 선수 주워오기로 팀 뎁스를 두텁게 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김성근 경질 이후 강도 높은 리빌딩을 표방하며 2021년에는 급기야 KBO 최고령 팀에서 가장 젊은 팀으로 오히려 완전히 팀 체질을 개선하였지만,[4] 반대로 이젠 베테랑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팀이란 기본적으로 나이대가 골고루 배치되면서 베테랑이 팀을 이끌고 신인들이 그를 배워가며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져야 하는데, 극단적인 베테랑 배제로 신인 선수들이 너무 쉽게 주전을 꿰차면서 경험 부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그 결과 2023 FA에서는 채은성을, 2024년에는 안치홍, 김강민을 영입, 팀 성적과 더불어 어린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해줄수 있는 베테랑들을 수집하며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김성근의 저주란 단순히 김성근 개인이 팀에 미친 악영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 수많은 혹사 감독들 중 유독 김성근 감독에게만 혹사의 딱지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김성근의 색채를 지우는 과정에서 구단과 후임 감독이 무리수를 두었고, 그것이 팀 케미스트리를 망가뜨리고 혼란을 가중시키면서 팀을 망가뜨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김성근의 책임을 굳이 강조하자면 김성근과 프런트와의 충돌을 프런트가 김성근 색채를 지우기 위해 무리하게 된 배경으로까지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베테랑 숙청을 김성근이 주도한 것도 아닌데 이를 단순히 김성근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3. 해당 팀 자체의 문제

김성근 감독이 맡은 팀들은 주로 약팀들이었고, 해당 팀들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은 자금 부족, 스카우팅 능력 부족, 육성 능력 부족, 경험 부족, 팀 케미스트리 붕괴 등 뭔가 문제가 있으니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약팀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을 때 비로소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게 기본인데, 김성근 감독이 맡았던 팀은 김성근의 윈나우 전략으로 일시적으로 전력을 짜내어 끌어올렸을 뿐 근본적으로 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포스트 김성근을 맞이했다.

특히 지금에야 세이버매트릭스를 기반으로 한 메이저리그식 프런트 야구가 이상적으로 그려져서 그렇지,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프런트 야구는 한국 프로야구에 많은 해악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며 오히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프런트가 야구단에 개입하는 것은 팬덤에서도 해악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에서도 1980-1990년대 OB 베어스, 2002년 이후의 LG 트윈스, 2010년대의 SK 와이번스는 대표적으로 프런트의 관여가 팀의 케미스트리를 망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당시 OB 프런트는 김성근 감독을 밀어내기 위해 이광환 2군 감독을 지원하며 둘의 충돌을 유도하였던 것이 정설이고, LG 프런트 또한 김성근 감독을 꾸준히 견제하고 김성근을 내보내자마자 일으킨 팀 프랜차이즈급 베테랑 정리, 탈쥐 효과로 불릴 정도로 신인 육성과 FA 잔혹사, 트레이드 잔혹사 등으로 증명되는 스카우팅 능력 부족 등으로 팀을 망쳐놓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나마 양호했던 SK조차도 김성근에 대한 선수단의 애정을 무시하고 김성근 색채 지우기에 지나치게 집중한 결과, 정근우, 정우람, 정대현 등 왕조를 이끌었던 프랜차이즈들을 대거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5]

이는 비단 김성근 감독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다. OB 베어스는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이후조차 OB 베어스 항명 파동을 알면서도 묵과했다. 프로야구 초기부터 야구계의 내밀한 정보에 가장 밀접하게 접근해왔던 스포츠서울 이종남 기자[6]는 이에 대해 구단주의 지지를 받던 윤동균 감독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프런트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을 정도. 2014년 두산은 전년도 준우승까지 이루었던 김진욱이 계속된 선수 유출에 항의하자 마무리캠프에서 갑자기 경질해버렸으며, 이는 2014년 두산 투수진의 붕괴로 이어졌다. 2003년 LG는 바로 전년도 김성근 감독을 몰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상훈, 김재현, 유지현 등 프랜차이즈들을 대거 퇴출시키려 하면서 그 김성근 감독을 몰아내면서 모셔온 이광환 감독과 충돌, 역시 경질시키면서 2군 감독으로 내려보내며 치욕을 안겨주었다.[7] 김성근과 전혀 인연이 없었던 롯데 또한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 같이 극단적인 사례까지 존재한다.

태평양 돌핀스는 극단적으로 말해 그 자리로 그냥 되돌아간 것에 가깝다. 애초에 짜내기를 통해 일시적으로 성장한 것일 뿐 뭔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있었던 팀들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태평양의 기록을 보면 혹사당하던 선수들은 그대로 혹사당했고, 박영길 선임으로 기대했던 타선조차 여전히 그대로 약했다. 아니, 오히려 더 떨어졌다.[8] 그저 1989년이 기적적인 성적을 거둔 것일 뿐, 그 성적 그대로 돌아간 것뿐인 것이다. 이는 아예 시즌을 포기하고 리빌딩에만 전면 집중했던 정동진 감독이 대단했을 뿐, 김성근의 책임을 묻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너무 많다. 쌍방울은 애초에 야구는 선수가 한다는 명제에서 그 선수를 팔아버린 케이스이니 논의할 가치도 없는 상황.

이는 현재진행형인 한화 또한 마찬가지다.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에서 윈나우 성향의 김성근 감독을 선택한 것이 애초에 실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의 한화는 이미 총체적 난국인 팀이었다. 주전들의 연령이 높아 리그 최고령이었던 것은 물론, 2000년대 중후반 지금 베테랑으로 활약해줘야 할 선수들을 뽑아야 할 시기에 드래프트에서 상위 라운드 정도만 지명하고 신인 수급을 포기하는 등 프런트의 태만이 심각한 수준이었다.[9] 중견수로 데이비스가 활약을 하니 중견수 후임을 안 키우다가 데이비스가 빠지고 나니 큰 공백을 겪은 끝에 이를 외부 영입인 이용규로 겨우 메꾸었으며, 2군 구장인 서산 구장조차 2012년 완공되고 재활군, 육성군 등의 훈련 공간인 제2구장은 2018년에야 완공되는 등 미래 준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실했던 팀이었다.] 김성근에 대한 지원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팀 자체가 망조 수준이었던 것. 게다가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로 대표되는 훈련 부족, 선수들에 대한 육성 능력 부족,[10] 짜내기조차 안 되는 전술 능력 부족 등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 한화였다. 김성근 감독 시기 혹사에 대한 논란이 많았음에도 초창기 한화 팬덤의 지지세가 꽤나 컸던 것, 2015년 당시 혹독한 훈련에 대한 긍정적 반응 등은 이처럼 기존 한화의 막장성을 팬덤 내에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김성근 감독 시절의 한화에 대해 유망주 유출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탈한 선수 중 한 시즌 반짝이 아닌 주전급으로 그나마 인정할 수 있는 정도로라도 성장한 선수는 기껏해야 노수광, 임기영 정도가 전부이다. 즉 2000년대 프런트의 막장 행보로 애초에 한화 구단 내 유망주는 진작부터 씨가 마른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FA 때마다 걸핏하면 현금 트레이드가 진행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까지 지명 선수들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 현역 유지도 못하고 대부분 방출될 정도로, 스카우팅 능력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11] 즉 김인식-김응용-김성근 감독에 이은 명장들이 베테랑만 선호한다고 하나같이 비판받았으나, 애초에 성장할 가능성 있는 신인 자체가 없는 수준이었다는 소리. 결국 2018년의 반짝 성적을 제외하면 제자리로 돌아갔을 뿐, 한화는 제대로 된 리빌딩이 진행되기 시작한 2021년 이전까지 본질적으로 그냥 프런트가 망친 그 자리를 항상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4. 결론

김성근의 저주라 불리는 수많은 상황들에서는 정말 다양한 양상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수많은 원인들이 존재한다. 해당 문서에 제시되었던 세 가지 문제만 봐도 첫번째 원인이 김성근에 의해 약화된 팀의 문제라면 두번째 원인은 김성근을 쫓아냄으로서 약화된 팀의 문제, 세번째 원인은 김성근이 있건없건 기본적으로 약했던 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각의 팀들은 그러한 영향 속에서 안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를 김성근만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굉장히 복잡하고 다면적으로 봐야 할 부분들이 많다.

다른 의미로 해석해 보면, 김성근 감독이란 극단적인 윈나우 감독, 프런트와 사사건건 충돌하며 외곬수 이미지가 박힌 승부사를 채용한다는 시점에서 이미 그 팀은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만년 꼴찌 구단이었던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 그리고 한화 이글스. 최강팀임에도 우승권에서 번번이 무너져내렸던 삼성 라이온스. 전력은 어느 정도 만들어졌지만 하위권을 맴돌며 반전을 꾀하던 SK 와이번스, 팀 케미스트리가 사실상 박살난 상태였던 LG 트윈스까지.

원년부터 함께 했던 OB 베어스 정도를 제외하면 뭔가 문제가 있기에 그것을 바꿀 극단적 대책이 필요한 팀들이 항상 김성근 감독을 택해왔으며,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스타일로 그것을 어느 정도 달성해왔다. 하지만 김성근이란 이름의 벽돌로 잠시 괴어둔다 해서 그 허술하던 벽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아니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벽돌을 빼는 순간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팀은 오히려 구조가 급격히 바뀌면서 더욱 급격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김성근 감독의 그림자도 있지만 본질적인 팀 자체의 문제 또한 있는 것이기에, 김성근의 저주란 그 현상이 계속되는 것일 뿐 어떤 우연적 요소나 누구 하나의 책임만을 몰아가기에는 어려운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2007년보단 2008년이 좋았으며, 2009년과 2010년 동안 점차 하락하다가 경질되었던 시점까지의 2011년에 오히려 평균자책점이 다시 내려갔다. [2] 가나다 순으로 강병철(한화), 김경문(두산, NC), 김기태(기아), 김성근(OB), 김성한(기아), 김시진(히어로즈), 김영덕(빙그레), 김용희(롯데), 김응용(해태, 삼성), 김인식(두산, 한화), 김재박(현대), 김태형(두산), 선동열(삼성), 양상문(LG), 염경엽(히어로즈), 이광환(LG), 조범현(SK, KT). [3] 사실 삼성을 제외한 모든 구단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어떻게 보면 혹사보다 이것이 더 크게 작용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4] 2021년 당시 KBO 리그에서 평균 연령이 25세인 유일한 팀이 되었다. [5] 정우람은 대놓고 김성근 감독 때문에 한화로 갔다고 인터뷰했으며, 정근우와 정대현은 이미 나가기 전부터 이만수가 잔류한 것만 보고 SK 팬덤조차 나가겠구나 하며 체념할 정도였다. [6] 1977년 한국일보 입사 이후 야구 전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국내 최초의 야구 경기 기록표를 만들기도 했다. 1999년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의 후원하에 말년에 유홍락, 천일평과 함께 발간한 < 한국야구사>를 발간하고 OB의 경우 방출 직전까지 몰렸던 장호연과 구단 사이를 중재하는 등 프런트, 선수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었다. [7] 심지어 이광환 감독은 1994년 당시 LG의 최전성기인 신바람야구를 이끈 전설적인 감독이며 프런트와의 사이가 그리 나쁜 편도 아니었다. [8] 타율 및 홈런이 줄어든 것은 물론 출루율, 장타율까지 모조리 감소했다. 심지어 펜스를 낮추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 1990년 김동기, 김경기 2명이 10홈런 이상을 기록한 것과 달리 1991년에는 두자릿수 홈런 기록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9] 당시 한화는 자그마치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에 걸쳐 하위 드래프트 지명권을 쓰지 않거나, 어차피 대학 갈 것이 확실한 선수를 지명하며 사실상 버렸다. 물론 뽑을 만한 선수가 없다면 안 뽑는 것도 드래프트의 전술이지만,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인 만큼 하위 라운드에서 의외로 좋은 선수들이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음에도 당시 프런트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던 것. 당시 한화가 순번상 뽑을 수 있었던 하위 라운드에는 1군급 선수만 해도 박정배, 임훈, 김진성, 이명기 등이 있었으며, 대어급 선수로도 자그마치 김현수(2006년 미지명 후 신고선수 등록), 양의지(2008년 8라운드 59번 지명), 김선빈(2008년 6라운드 43번 지명)이 있었다. [10] 김성근 부임 이전인 2014년 이용규가 FA로 한화로 이적했는데, 자그마치 한화 1군 야수진의 막내였다. 이용규가 2004년 라운드였으니 2005년부터 2010년 드래프트까지, 하위픽을 안 찍은 것은 물론 상위픽 야수들조차 이때까지 주전으로 올라선 선수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소리다. [11] 2010~2014년 드래프트에서 한화가 지명한 선수 중 현역으로 아직 뛰고 있는 선수는 이태양, 하주석, 임기영, 한승택, 이충호, 김종수 정도가 남아있으며, 1라운드 픽은 하주석 빼고 싸그리 전멸했다. 심지어 그나마 가능성을 보여주나 싶었던 김원석(SNS 막말 논란), 안승민(불법도박, 전세사기), 유창식(승부조작, 성폭행)이 죄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하주석조차도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은 덤. 물론 1차 지명 제도가 있던 시절에는 충청팜이 최악이었고 1차 지명 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하위권이었음에도 NC, KT 등의 창단으로 1픽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등 운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나, 이 정도로 드래프트 지명에 철저하게 실패하는 구단은 전 구단을 통틀어서도 독보적이다. 2015년 이후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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