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1 23:53:21

김문호(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사망 1908년 5월 13일
안장지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1991)
1. 배경2. 독립운동3. 피체, 순국4. 참고문헌

[clearfix]

1. 배경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 해산으로 항일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08년경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는 안동지역에서 일어난 류시연(柳時淵) 의진(義陳)과 박처사(朴處士) 의진을 비롯하여 영덕의 신돌석(申乭石), 영양의 이하현(李夏鉉), 의성의 박연백(朴淵伯), 청송의 강진선(姜進善),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등 여러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통한 대일항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2. 독립운동

처음에는 류시연 의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박처사 의진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류시연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출신인데 전기 의병 때에도 활동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자신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여 1908년 여름까지 진보(眞寶)·영덕(盈德) 등지에서 항쟁을 펼쳤다. 그러나 1906년 6월 대구 관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1907년 2월부터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월 이후는 주로 영양군 일월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은 계속 좁혀져 왔다. 이를 피해 부대는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부근의 봉황사(鳳凰寺)로 물러나 있던 중 1908년 2월 28일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큰 희생을 치르고 흩어졌다.

이후 박처사 의진으로 옮겨갔다. 박처사는 본명이 박인화(朴人和)인데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안동에서 창의하여 안동·예안·영양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박처사는 1908년 1월 이후 영양, 청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박처사의 실인(實印)과 안동군 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출급을 위한 수표(手票)를 소지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군자금 징수에 노력하였다.
파일:3D7ZhKRk6t.png
김문호 부대와의 교전에 대한 일제 측 문서(1908.5.6)

3. 피체, 순국

1908년 4월 29일 부하 30명을 이끌고 진보(眞寶)에서 약 1리 떨어져 있는 서면(西面) 황곡(黃谷) 민가에서 숙영하던 중 오기하라(荻原) 순사부장이 이끄는 변장순사대(變裝巡査隊)가 포위망을 좁혀 오는 것을 알고 피신하였다. 하지만 오기하라 순사대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숙영지에서 약간 떨어진 고산(高山)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변장순사대의 급습을 받고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3일 변장순사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참고문헌

羞愧逮捕와 射殺의 件(大秘收 제902-1호, 1908. 5. 9), 暴徒에 關한 編冊
第二變裝搜査隊 行動報告의 件(大秘收 제867호, 1908. 5. 4), 暴徒에 關한 編冊
第二變裝搜査隊에서 義兵將을 逮捕했다는 報告(警秘 제705호, 1908. 5. 2), 暴徒에 關한 編冊

동명이인 한국광복군 김문호는 김문호(1911)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