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1] 7월 29일 |
경상남도
기장군 읍내면 사라동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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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7년 10월 6일 |
경상남도 동래군 | |
이명 | 김석연(金石然)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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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도엽은 1899년 7월 29일 경상남도 기장군 읍내면 사라동(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에서 마부인 김수문(金守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권철암· 구수암·김수룡(金壽龍)· 최기복·이택규(李澤奎)·최창용(崔昌鎔)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그들은 기장면사무소 서기인 최창용으로부터 등사기를 빌려 독립선언서를 400여매 인쇄하였으며,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 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기와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기장면 장날을 이용,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1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0년 4월 22일 대구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1919년 5월 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었고 8월 30일 대구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1월 30일 출옥 #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수표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에 거주하면서 # 동아일보사 발송계(發送係)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
1930년 6월 10일 박용선(朴容善)과 함께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펴다가 평양(平壤)에서 신의주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3년 2월 9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1933년 4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7년 10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김도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2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