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김경천(金景天) |
본관 | 김해 김씨 |
생몰 | 1888년 12월 17일 ~ 1938년 9월 25일 |
출생지 |
전라도
영암군 청산진 (현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이월리)[1] |
사망지 | 전라남도 완도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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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경천은 1888년 12월 17일 전라도 영암군 청산진(현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이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완도군 소안리에서 김사홍(金仕홍)이 중화학원(中和學院)을 설립하자 교사로 임명되어 청소년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1922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러던 1919년 3월 15일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崔亨天), 신준희, 강정태, 백태윤(白泰胤) 등과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완도면 읍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여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읍내를 행진하는 시위를 벌였다.이후 1922년 5월 1일 사립소안학교(私立所安學校) 설립 인가를 받아 2대 교장이 되어 면민(面民)의 의연금으로 설립된 학교의 이념을 살려 민족교육을 구현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7년 5월 10일 총독부가 실시한 사립학교 설치령 제16조에 의해 소안학교가 폐쇄되자, 그는 5월 18일 일제의 강제적 폐교에 반대하며 복교운동을 전개했다. 일제가 구축함(驅逐艦)을 파송하여 학교를 완전 봉쇄하자, 그는 이에 대항하여 전남 학무국에 학교 폐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진정서를 보내고 강소천(姜小泉)·정남국의 학교폐쇄 반대운동을 지원하는 등 민족교육기관의 수호를 위해 힘썼다. 이후 완도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38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