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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기본(己本) |
아들 |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
자매 | 기전지(旣殿至) |
1. 개요
己本旱岐, 생몰년도 미상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왕. 일본서기에서 가라국(加羅國)은 반파국을 칭하던 표현이었다.
한기(旱岐)는 가야 소국의 왕을 지칭하는 호칭이라 '기본(己本)'이 이름에 해당된다.
2. 생애
62년(262년 /
38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사치히코)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一) 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62년[번역]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사치히코)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一) 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62년[번역]
일본서기에 따르면 382년 왜국의 장수 사치히코의 공격을 받아 아들 백구지 등과 함께 백제로 도망쳤다.[2] 백제는 이들을 잘 대해주었으며, 기본한기의 누이 기전지가 일본으로 파견해서 사치히코의 만행을 알렸다. 일본서기에서는 천황이 목라근자를 파견해 가야 사직을 복구시킨 것으로 묘사했지만, 목라근자는 왜국이 아닌 백제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백제가 사치히코를 축출하고 기본한기의 가야국을 복구시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기타
기본한기의 정체에 대해서는 금관가야, 대가야의 국왕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금관가야의 왕으로 비정될 경우, 이시품왕으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석일본기 훈이 코포칸키(コホカンキ)로 이품과는 영 달라서 애매하다.
[번역]
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
[2]
이주갑인상으로 본다면 당시 백제는
근구수왕(375년 ~ 384년)이 다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