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21:39:55

기 드 몽포르

파일:기 드 몽포르.jpg
성명 기 드 몽포르
Guy de Montfort
생몰년도 1244년경 ~ 1292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메시나
아버지 시몽 드 몽포르
어머니 엘리노어 플랜태저넷
형제 앙리, 시몽, 아모리, 잔, 리샤르, 엘레오노르
배우자 마르게리타 알도브라네스키
자녀 아나스타지, 토마시나
직위 놀라 백작, 토스카나 대리 장군

1. 개요2. 생애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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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시몽 드 몽포르의 4남이다.

2. 생애

1244년경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존 왕 앙굴렘의 이자벨의 셋째 딸인 엘리노어의 4남으로 출생했다. 14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아버지 군대의 분견대 하나를 지휘해 승리를 거두고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을 사로잡는 데 일조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사실상 통치자가 된 시몽 드 몽포르는 아들 기에게 콘월의 리처드의 영지였던 데본과 콘월에 대한 관리권을 수여했다.

그러나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아버지와 큰형 앙리가 전사했을 때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그 후 윈저 성에 투옥되었다가 도버 성으로 이송되었고, 1266년 4월 또는 5월에 프랑스로 탈출했다. 1268년경 이탈리아로 가서 앙주 백작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카를루 1세를 섬겼다. 1268년 8월, 기는 카를루 1세의 원정에 참여하여 콘라딘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참여해 전공을 세웠다. 그 후 기는 카를루 1세가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걸 도와줬고, 그 보상으로 이탈리아 본토의 관리권을 획득했고 놀라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1270년 3월 토스카나의 대리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270년 12월, 형 소 시몽 드 몽포르와 재회한 뒤 카를루 1세에게 형을 소개해 시종이 되도록 해줬다. 그러던 1271년 3월 초,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형제 콘월의 리처드의 아들인 알메인의 헨리 에드워드 왕자 십자군 원정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자 카를루 1세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교황 선거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던 비테르보에 도착해 카를루 1세와 접견했다. 3월 12일, 기와 시몽 형제가 비테르보에 도착했다. 그들은 알메인의 헨리가 도시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버지의 형을 잔혹하게 살해한 잉글랜드 왕실에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1271년 3월 13일 아침, 기 드 몽포르는 형제 시몽과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알메인의 헨리가 산 실베스트로 교회의 미사에 참여했을 때 습격해 교회 정문으로 끌고 간 뒤 칼로 찔러 죽였다. 일설에 따르면, 헨리가 자비를 간청하자, 기 드 몽포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희는 이브샴에서 쓰러진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 후 기 드 몽포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몽 드 몽포르의 시신이 절단된 것처럼 헨리의 시신을 절단했다. 헨리의 유해는 나중에 수습되었고, 내장은 비테르보 대성당에 묻혔고 시신은 잉글랜드로 옮겨져 1271년 5월 21일 아버지가 헤일스 수도원의 중앙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후 기는 형제 시몽과 함께 도주했고, 카를루 1세는 그의 지위와 재산을 박탈했다. 하지만 당시엔 교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그가 그동안 카를루 1세의 측근으로서 이탈리아에 자리를 잘 잡아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1273년 3월 에드워드 1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알메인의 헨리 암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기를 고발했다. 교황이 당시 시에나 인근에 은거하던 기에게 출두 명령을 내리자, 그는 이를 거부했고 4월 1일에 파문되었다. 그 해 7월, 그레고리오 10세가 피렌체를 지나갈 때, 기는 셔츠만 입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맨발로 그 앞에 나타나 자비를 구하며 2마일이나 따라갔다. 이에 교황은 그를 카를루 1세에게 넘겨줬고, 카를루 1세는 그를 코모 호수변의 레코 성에 가두었다.

1274년 5월, 그는 레코 성에서 나왔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탈옥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 친척과 이탈리아의 구엘프 도시들이 제공한 1,000온스의 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석방되었다고 한다. 1279년 시칠리아 왕위 계승자인 카를로 왕자는 에드워드 1세와 기와의 화해를 주선했지만 실패했다. 1281년 카를루 1세의 용서를 받고 다시 측근이 되었다. 1283년 마르티노 4세로부터 사면받고 로마냐에 있는 아내의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었으며, 5월 11일에 교황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284년 아내의 유산을 받기 위해 토스카나로 돌아갔다가 시칠리아의 만종 이후 잃어버린 시칠리아를 되찾으려는 카를루 1세의 호출을 받고 돌아와서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1287년 6월 23일 나폴리 해안가에서 벌어진 해전에 참여했다가 아라곤 제독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시칠리아로 보내져서 메시나 감옥에 갇혔다. 그의 친적인 장 드 몽포르가 기의 몸값을 지불해서 풀어주려 했지만 실패했고, 기는 1292년경 옥사했다.

3. 가족

  • 마르게리타 알도브란데스키(1255 ~ ?): 소바나 백작이자 피틸리아노 백작 일데브란디노 알도브란데스키의 딸. 기 드 몽포르가 사망한 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조카인 로프레도 카에타니와 재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로프레도 카에타니에게 통치권을 주기를 거부하자 교황이 결혼을 취소했다. 그녀는 나중에 오르셀로 오르시니와 결혼했지만 2년만에 남편이 죽고 시에나군이 영지를 압박해오자, 1298년 시에나의 적이자 기벨린 파벌이었던 산타 피오라의 귀도 알도브란데스키 백작과 결혼해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시에나군의 공세에 결국 패배를 면치 못하고 귀도 알도브란데스키와 함께 항복하고 교황청에 넘어간 뒤, 시에나 기사이자 토스카나 구엘프 연맹 수장이었던 넬로 판노키에스키와 1303년에 강제 결혼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11일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아니니 사건 여파로 사망하고 교황령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오르비에토로 달아났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 아나스타지 드 몽포르(1271/1273 ~ 1306): 놀라 여백작. 로마 원로원 의원 로마노 오르시니의 부인.
    • 토마시나 드 몽포르: 로마 지사 피에트로 비코의 부인.

4. 여담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 편 제12장에서 기 드 몽포르가 1271년에 암살을 자행한 행위를 묘사한 벽화로 둘러싸인 끓는 피의 강에 다른 살인자들과 함께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