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3:55:59

금입택

파일:external/www.gasengi.com/91fd8e373df5901ac5e512d650af3eb0_1387203140.75.png
'신라왕경' 복원 상상도. 지붕을 금으로 씌운 금입택을 묘사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파일:신라 왕경도.jpg
파일:신라 왕경도 내 금입택의 모습.jpg
신라 왕경도의 월성과 대궁지 부근에 묘사된 금입택의 모습

1. 개요2. 기록3. 관련 유물4. 여담5. 금입택 목록

1. 개요



통일신라의 전성기 시절, 수도 서라벌의 고위 귀족들이 거주한 호화저택. 황금을 씌운 집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거대한 집 전체에 통째로 황금 금박을 씌웠다. 저택마다 각자의 고유한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고려 중후기 여몽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2. 기록

신라가 전성기일 때는, 수도에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금입택은 남택(南宅)ㆍ북택(北宅)ㆍ우비소택(亐比所宅)ㆍ본피택(本彼宅)ㆍ양택(梁宅)ㆍ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이다.)ㆍ재매정택(財買井宅)ㆍ북유택(北維宅)ㆍ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ㆍ대택(隊宅)ㆍ빈지택(賓支宅)[반향사의 북쪽]ㆍ장사택(長沙宅)ㆍ상앵택(上櫻宅)ㆍ하앵택(下櫻宅)ㆍ수망택(水望宅)ㆍ천택(泉宅)ㆍ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ㆍ한기택(漢岐宅)(법류사(法流寺) 남쪽)ㆍ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ㆍ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ㆍ별교택(別敎宅)[내의 북쪽]ㆍ아남택(衙南宅)ㆍ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 남쪽]ㆍ곡수택(曲水宅)[내의 북쪽]ㆍ유야택(柳也宅)ㆍ사하택(寺下宅)ㆍ사량택(沙梁宅)ㆍ정상택(井上宅)ㆍ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ㆍ사내곡택(思內曲宅)ㆍ지택(池宅)ㆍ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ㆍ임상택(林上宅)(청룡(靑龍)의 절 동쪽에 연못이 있다.)ㆍ교남택(橋南宅)ㆍ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이다.)ㆍ누상택(樓上宅)ㆍ이상택(里上宅)ㆍ명남택(椧南宅)ㆍ정하택(井下宅) 등이다.
삼국유사》제1<기이> 진한

《삼국유사》에선 금입택이 35채였다고 적혀 있으나 그 뒤에 실제로 금입택이라고 열거하는 걸 세보면 39채다.(...) 잘못 썼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신라 6부의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 고려의 얘기기는 하지만 의종 대 별궁이 기록에 따라 “궁”이 아닌 “택”으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어 호환이 가능하기 때문. 다만 양궁, 사량궁, 본피궁과 다르게 한기택이 궁으로 나온 기록은 없어서 다소 애매하다. 이렇다 보니 일단 기록에 나온 숫자는 헌덕왕대가 기준이나 헌덕왕 때 다 지어진 게 아니라 그보다 이전 시기부터 금입택이 지어진 가능성도 거론되는 등 금입택에 대해선 여러 가설이 있다. 일단 역사학계에선 권세를 가진 진골 귀족이 가진 저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저 중 김유신 가문의 제매정택 집터는 현재에도 그 위치가 비정되고 있는데, 경주 월성과 교동마을 바로 서쪽이다. 그 외에도 많은 집의 이름이 전통있는 귀족 집안일 것이므로 다른 여러 기록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이름이 많다.

위 리스트 중 몇몇 집은 택 자만 궁(宮)자로 바꿔 궁궐로 대우한 기록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적판궁'은 금입택 리스트 중에서 '판적택'과 같은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본래 판적택은 김균정의 저택이었는데 아들 김우징이 왕이 된 이후에 아버지의 저택을 별궁으로 지정해 판적궁(적판궁)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3. 관련 유물

2020년 발굴 조사에서 금입택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연못터가 경주시 구황동 낭산 기슭의 왕실 사원터인 황복사터 유적에서 발견됐다. #
2022년 1월 6일, 금입택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유물 50여개가 경주시에서 발견되었다. #

이번에 발견한 것은 신라시대 당시 계단 양옆에 설치한 난간 받침돌의 파편인데 연구 결과 당시 신라인들이 계단 전체를 황금 및 금동판으로 화려하게 감쌌음이 드러났다. 계단 전체에 금동판을 부착한 뒤 고정하기 위해 27개의 못을 박은 흔적이 뚜렷하며, 그 형태가 경주 월지에서 발견된 각종 황금 금동판 장식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단에 뚫어놓은 못 구멍에 신라인들이 과학적으로 88.7%의 납을 충전재로 넣었다는 사실 또한 포항공대 나노융합기술원이 밝혀냈다. 계단 받침돌까지 금동판으로 꾸민 것은 확인이 가능한 영역의 한국사에선 아마도 유일한 사례라고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등이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황룡사 남쪽에 위치한 통일신라대 가옥군들 가운데에도 금입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중이다. 함께 발굴조사중인 미탄사는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부터 사찰 역할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유력귀족의 자택을 개조해 절로 사용한 듯 자유로운 가람배치가 특징임이 밝혀졌으며, 가옥군의 규모와 황룡사 남쪽과 미탄사 중간에 위치한 것을 보면 귀족가문의 자택들이 모여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4. 여담

일반적으로 금입택을 기억해야 하는 상황은 각종 한국사 시험(...)이다. 신라 고려나 비슷하게 귀족제 사회였지만, 지문에 금입택이 나오면 그건 신라고, 고려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조선에서는 유교의 영향 혹은 고려 귀족과 일부 사찰 승려들의 과한 사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위층의 사치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금입택이 지어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2] 그래서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들이 일본의 금입택을 보고 남긴 기록을 보면, 대단히 사치스럽다며 놀라거나 감탄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다며 비판하거나 돈을 쳐바른 것이 자신의 주군이라는 자의 집보다 더하니 이거 위아래가 없는 거 아니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황금으로 도배했다는 임팩트 덕분에 ' 사치 끝판왕'이라는 이미지로도 인식되고 있다. 물론 사치가 맞고 한국사에서는 거의 유례없는 케이스긴 한데[3], 세계사로 범위를 넓혀보면 건물을 금박으로 씌운 사례는 생각보단 제법 있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사례로는 미얀마 쉐다곤 파고다, 인도 암리차르 황금사원, 일본 금각사 등이 있다.[4] 사실 신라나 고려왕조의 귀족사회가 특별히 사치를 심하게 했다기보다는 유교적 검약을 중시한 조선왕조가 세계적으로는 예외적 사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실 수국사 항목에도 있지만, 의외로 실용적인 용도도 있다. 일반적인 전통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는데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거 감안해도 금으로 짓는게 아닌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이는 것조차 돈이 많이 들긴 한다.

자금성 기와가 황금빛이라 자금성도 금입택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지만 자금성 기와는 그냥 황금색으로 칠한 기와이다. 금입택 기와처럼 금박을 씌운 것이 아니다.

5. 금입택 목록

  • 1. 남택(南宅): 경주 월성 남쪽에 있었던 황금 저택으로 현 국립경주박물관 인근. (박물관 터 조성 중 남궁지인(南宮之印) 인장기와 출토)
  • 2. 북택(北宅): 경주 월성 북쪽에 있었던 황금 저택, 현 성동동 전랑지 인근.
  • 3. 우비소택(亏比所宅)
  • 4. 본피택(本彼宅): 신라 6부(훼부(양부), 사훼부(사량부), 본피부, 한기부, 사피부(습비부), 잠훼부(모량부))의 이궁으로 추정. 법류사(法流寺) 남쪽에 위치.
  • 5. 양택(梁宅): 삼국사기에 나오는 양궁(梁宮)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 현 용황초등학교 뒷쪽 공터.
  • 6. 지상택(池上宅): 신라 6부 중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황금 저택. 현 헌덕왕릉 남쪽 북천 인근.
  • 7. 재매정택(財買井宅): 김유신의 생가. 사적 제246호 재매정에 위치.
  • 8. 북유택(北維宅): 신라 6부 중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황금 저택. 현 괘릉리 인근.
  • 9. 남유택(南維宅): 신라 6부 중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황금 저택. 현 괘릉리 인근.
  • 10. 대택(隊宅)
  • 11. 빈지택(賓支宅):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빈지(賓之). 현 괘릉리 인근.
  • 12. 장사택(長沙宅): 현 망덕사 인근. 경명왕비가 태어난 곳이다.
  • 13. 상앵택(上櫻宅)
  • 14. 하앵택(下櫻宅)
  • 15. 수망택(水望宅): 글자 순서를 바꿔 망수택(望水宅)이란 기록도 있으며,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 금 160푼과 곡식 2천곡을 기부한 기록이 있다.
  • 16. 천택(泉宅)
  • 17. 양상택(楊上宅): 신라 6부 중 양부의 남쪽.
  • 18. 한기택(漢岐宅): 신라 6부 중 한기부에 있었던 황금 저택. 법류사(法流寺) 남쪽에 위치.
  • 19. 비혈택(鼻穴宅): 법류사(法流寺) 남쪽에 위치.
  • 20. 판적택(板積宅): 현 분황사 북편.
  • 21. 별교택(別敎宅): 현 분황사 동편 원지 발굴지(천북면(川北面) 인근).
  • 22. 아남택(衙南宅)
  • 23. 김양종택(金楊宗[5]宅): 양관사(梁官寺) 남쪽에 위치.
  • 24. 곡수택(曲水宅): 현 분황사 동편 원지 발굴지(천북면(川北面) 인근).
  • 25. 유야택(柳也宅)
  • 26. 사하택(寺下宅): 칠처가람(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의 남쪽.
  • 27. 사량택(沙梁宅):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훼부(사량부)의 사량궁(沙粱宮)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
  • 28. 정상택(井上宅)
  • 29. 이남택(里南宅):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 금 160푼과 곡식 2천곡을 기부한 기록이 있다.
  • 30. 사내곡택(思內曲宅)
  • 31. 지택(池宅)
  • 32. 사상택(寺上宅): 칠처가람(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의 북쪽.
  • 33. 임상택(林上宅)
  • 34. 교남택(橋南宅): 월정교 춘양교 남쪽에 위치.
  • 35. 항질택(巷叱宅): 신라 6부 중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황금 저택.
  • 36. 누상택(樓上宅)
  • 37. 이상택(里上宅): 신라 최대 황룡사 대종을 주조한 장인 집단을 보유했다고 한다.
  • 38. 명남택(椧南宅): 경주 남산에 있는 북명사(北椧寺)의 남쪽.
  • 39. 정하택(井下宅)

번외1 사절유택(四節遊宅): 4계절별로 음주가무와 풍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신라의 호화 별장.
  • 봄: 동야택(東野宅)
  • 여름: 곡량택(谷良宅)
  • 가을: 구지택(仇知宅): 경주 배반동 일대.
  • 겨울: 가이택(加伊宅)

번외2 월유택: 금입택에는 들어가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서 따로 황금으로 만들어진 저택으로 묘사된 곳.

기타
[1]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2] 대신 조선은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하층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진 여지도 있다. [3] 다만 정함의 집처럼 고려시대에도 건축물에 금장식한 케이스가 알려져있다. [4] 물론 개보수된 흔적이 있다. [5] 헌덕왕 시기 파진찬으로서 집사부의 시중을 역임한 김양종(金亮宗)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