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8:28:48

그냥 나시고렝 주세요

1. 개요2. 배경3. 가사


Geef Mij Maar Nasi Goreng (Just Give Me Nasi Goreng)

1. 개요

비테커 판 도르트(Wieteke van Dort)가 1977년에 작사, 작곡한 네덜란드어 노래로 비테커의 대표곡이다. 네덜란드 인도네시아에서, 그리고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비테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인도네시아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아 쓴 곡으로, 1957년 서뉴기니 분쟁 당시에 분쟁에 휘말릴까 봐 네덜란드로 이민 왔을 때의 경험담을 가사에 담은 것으로 인도네시아 음식을 진짜로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클립은 비테커 본인이 실제 사용하는 강한 동인도(인도네시아) 억양의 네덜란드어로 부른 것이며, 검색해 보면 인도네시아에서도 커버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2. 배경

인도네시아는 20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특히 식민지 지배 기간이 긴 자바 섬에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지주나 관료, 자본가 등 사회 상위 계층을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이들은 중남미 크리오요처럼 밟아 보지도 못한 지구 반대편 땅인 네덜란드 본토에 대한 귀속 의식이 희미해지고, 인도네시아를 자기들의 고향이라고 인식해 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인도네시아가 독립하고 수카르노 정부와 인도네시아 토착민들이 유럽계를 냉대하자, 이들은 생활 기반이 있는 고향(인도네시아)을 버리고 주 사용 언어가 같은[1]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거나, 냉대를 감수하고 고향에 남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많은 유럽계는 독립 이후에도 인도네시아에 남기를 선택해 인도네시아인이 되었지만, 1957년 네덜란드령 뉴기니 귀속 문제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간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부분의 네덜란드계는 인도네시아를 떠났다. 이렇게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동인도식 생활 습관을 버리지 못하며 여전히 인도네시아를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7년에 네덜란드로 간 판 도르트(van Dort) 가족도 이런 경우였는데, 이들은 아래 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네덜란드 날씨가 너무 춥고 네덜란드 요리도 입에 안 맞아서 고생했다고 한다.[2]

정말로 인도네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일부는 1957년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정부를 겉으로라도 지지하며 인도네시아에 남거나, 수하르토가 집권하고 인도네시아와 서방의 분쟁이 정리된 후 인도네시아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에 남은 유럽계나 유럽계 혼혈 후손 중 오늘날 인도네시아 연예계에서 모델, 배우, 가수 등 연예인으로 활동하거나, 운동 선수로 뛰는 사람이 꽤 있다. 독립 후 관료, 정치인, 군인 등의 자리는 거의 토착민이 차지했지만, 일부 고명한 대학 교수 등 당장 대체 불가능한 지식인들은 인도네시아 정부 측에서 편의를 봐 주며 계속 잔류시키기도 했다.

3. 가사

1절
Toen wij repatrieerden uit de gordel van smaragd
Dat Nederland zo koud was hadden wij toch nooit gedacht
Maar 't ergste was 't eten
Nog erger dan op reis
Aardapp'len, vlees en groenten en suiker op de rijst

우리가 에메랄드빛 나라에서 떠나왔을 때
네덜란드가 이렇게 추울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렇지만 최악은 음식이었어요
여행하며 먹은 것보다도 더 나빴으니까요
감자, 고기, 야채랑 설탕 뿌린 쌀밥이라니

2절
Geen lontong, sate babi, en niets smaakt hier pedis
Geen trassi, sroendeng, bandeng en geen tahoe petis
Kwee lapis, onde-onde, geen ketella of ba-pao
Geen ketan, geen goela-djawa, daarom ja, ik zeg nou

론통(lontong)도, 사테 바비(sate babi)도 없죠, 알싸한(pedis) 것도 없고요
트라시(terasi)도, 스룬뎅(serundeng)도, 갯농어(bandeng)도, 두부 프티스(tahu petis)도
쿠에 라피스(kue lapis)도, 클레폰(klepon, onde-onde)도 없죠, 케텔라(ketella)나 바파오(ba-pao)도 없어요
찹쌀도, 야자 설탕도 없으니까, 네, 그걸로 좋아요

3절
Ik ben nou wel gewend, ja aan die boerenkool met worst
Aan hutspot, pake klapperstuk, aan mellek voor de dorst
Aan stamppot met andijwie, aan spruitjes, erwtensoep
Maar 't lekkerst toch is rijst, ja en daarom steeds ik roep

소시지랑 나오는 케일에는 익숙해졌어요
코코넛 조각 넣은 스튜도, 목 마를 때 우유 마시는 데도요
네덜란드 상추(andijwie) 넣은 찌개도, 양배추(spruitjes)도, 완두콩 수프도요
그래도 역시 쌀밥이 최고죠, 네, 그래서 항상 외치는 거예요

(후렴) - 각 절이 끝날 때마다 한 번씩 삽입한다.
Geef mij maar nasi goreng met een gebakken ei
Wat sambal en wat kroepoek en een goed glas bier erbij
Geef mij maar nasi goreng met een gebakken ei
Wat sambal en wat kroepoek en een goed glas bier erbij

그냥 나시고렝 주세요, 계란 프라이
삼발 약간, 크루푹(kerupuk) 약간, 그리고 멋진 맥주 한 잔
그냥 나시고렝 주세요, 계란 프라이랑
삼발 약간, 크루푹 약간, 그리고 멋진 맥주 한 잔


[1] 다만 이렇게 동인도에 토착화된 유럽계는 기본적으로 동인도의 공용어였던 인도네시아어(말레이어) 일상 회화가 가능했고, 상당수는 인도네시아어로 읽고 쓸 줄 알았다. 앞서 적은 '동인도 억양의 네덜란드어'란 것도 말레이어 내지 자바어 억양이 섞인 네덜란드어였다. 따라서 당시 정부가 시동을 걸기 시작한 인도네시아어 전용 정책이 계속되더라도 언어가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자바 섬의 화교 후예들 상당수가 오늘날 중국어를 전혀 쓰지 않고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만 쓰면서 그럭저럭 적응해 사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2] 이런 사례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식민지에서 발생했다. 한반도에서도 일제강점기 시기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 이민 2세대까지 탄생했으나 광복 이후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본토'인 일본으로 쫓겨났지만, 정작 일본에선 이들을 받아줄 여건이 전혀 안되었다가 급작스럽게 받다보니 제대로 된 지원이 주어지지 않아서 가난을 면하지 못했을뿐더러,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한반도식 문화에 익숙해져있다보니 일본 본토의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현지인들로부터 냉대를 당했다. 그러다보니 역설적으로 이들은 일본에 자신들이 '고향'에서 즐겨먹던 한국 음식들을 소개하는 문화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에는 본 항목에서도 소개되는 나시고렝이 있다면 한반도와 일본에는 명란젓이 대표적으로, 한반도에서 나고자란 이민 2세대가 일본 본토로 쫓겨난 뒤 '고향'에서 먹던 음식인 명란젓(주로 부산지역)을 재현해서 먹던게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어서 일본 전국으로 전파된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