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경덕(景德) |
호 | 소허(素虛), 소허재(素虛齋)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39년[2]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면 유곡리 (現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84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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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0년 11월 23일 (향년 61세) |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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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조선 명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권벌의 12대손이다.
2. 생애
1839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면 유곡리(現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84번지)에서 아버지 권정하(權定夏, 1814 ~ 1868. 4. 5.)[3]와 어머니 한양 조씨(1811 ~ 1877. 3. 5.)[4] 사이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2년( 고종 2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으나, 탈이 있어 사양했다. 이듬해인 1893년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부사과(副司果) 등을 지냈다.
1896년 1월 21일 족형(族兄) 권세연(權世淵)이 안동부 안동군에서 의병진을 창설하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자, 이때 초모장(招募將)에 임명되었다. 이후 순흥의진 홍종선(洪鍾善) 휘하에서 부약장(副約長) 겸 초모장으로 있던 신태운(申泰雲)과 함께 당시 충주부 영월군에 주둔 중이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소모장(召募將) 서상렬(徐相烈)을 방문해 호좌의진의 경상도 진출을 독려하기도 했다.
1896년 3월 12일, 권세연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창의대장직을 사퇴하자, 이튿날인 3월 13일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에 취임해 지휘부를 재편성했다. 그러나 안동부 함창군 현내면 태봉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일어난 태봉 전투(胎峰戰鬪)에서 호좌의진·풍기의진·순흥의진·영주의진·봉화의진·예안의진 등 6개 의병진과 연합해 약 7천 명의 병력을 모았음에도 불구, 50명에서 100명의 일본 제국 육군에 패배했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이 안동군 부내면 안기동(現 안동시 안기동)에 불을 놓아 읍내가 순식간에 불타고 말았다. 그해 4월 초, 안동의진에서 재기를 위해 진용을 재정비하자, 부장(副將) 겸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9월 11일 관군이 안동군 부내면 읍내에 도착하자, 결국 안동의진은 해산되었다. 안동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1899년 5월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임명되었으나 5일 만에 사직했고, 이후 11월에 신정왕후 조씨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고쳐 올릴 때 옥책을 받든 관리로 참여한 공로로 망아지 1필을 하사받았다.
1900년 6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11일 만에 사직했으며, 7월 황태자 이척이 축하받는 자리에서 선전관(宣傳官)이 전문(箋文)을 펼쳐 읽을 때, 전문을 들어서 펼쳐 주던 관리로 참여해 망아지 1필을 또 하사받았다. 8월에는 강서원관(講書院官)을 겸직했다.
이후 1900년 11월 23일 별세했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