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具滋雲1926년 11월 3일 ~ 1972년 12월 15일[1] (향년 46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 중도정(현 부산광역시 서구 부용동) 출생. 본관은 능성(綾城)[2]이다.
시인이며 러시아어, 일본어 번역가. 소아마비로 평생을 불구의 몸과 싸우며 시작에 전념했다.
모더니즘이 팽배했던 1950년대 문단에서 한국 전통시의 서정성 회복에 애썼다.구자운은 “순수 서정에 발디딤을 하여 민족적 언어―시조로부터 이어온 우리의 현대시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대 문학 신인 문학상을 받은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동양적 방법’을 강조했다.
심오하고 지혜로운 동양 고전의 총림(叢林)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중략)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서양의 지성인들에게 동양적 방법을 제시함은 결코 의의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ㅡ구자운,「동양적 방법」, 제4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소감(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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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을 기점으로 이후 탐미적인 시, 언어적 세련미 추구 경향에서 현실적, 시대적 경향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제적 곤궁과 개인적 불운이 겹치면서 어렵고 힘든 시기의 고백이 묻어나는 시가 많이 나타난다.생업으로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안톤 체호프 등의 작품들과 여러 원서를 번역하였다. 러시아어, 일본어에 모두 능통해서 일본어 텍스트와 러시아어 텍스트를 함께 놓고 번역을 했는데 <데카메론>처럼 일본어 중역이 확실한 글도 있고 바보 이반을 비롯한 톨스토이 단편들은 냉전 시대의 한계로 출판사에서 원문을 구해주지 못해 일어 중역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구자운의 번역은 주로 일신서적에서 출간했는데 70~90년대엔 한국에 번역과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아 출판사들이 번역을 무단으로 가져다 재출간하는 악습이 워낙 심하여 일신서적, 동서문화사, 하서 같은 오래된 군소 출판사들의 역본이 뒤섞이고 편집부에서 임의로 원고를 수정하기까지 해서 어느것이 진짜 구자운의 역본인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또한 일신서적에서 나온 구자운 번역의 책도 채수동의 번역과 유사해 더욱 혼란스럽다.
- 1949년 동양외국어전문학원 노어과 수료
- 1955년 대한광업회( 산업통상자원부 유관단체인 현 한국광업협회의 전신) 근무
- 1955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균열'로 등단
- 1956년 '청자수병' 발표 #
- 1957년 '매(梅)' 발표
- 1959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1962년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상임논설위원
- 1966년 월간스포츠 편집장
- 1969년 시집 '청자수병'(김영태 장정,三愛社) 출간(생전 유일한 정식 출간 시집)
- 1971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 1976년 시집 '벌거숭이 바다'(시인 민영 편집, 창작과비평사) 사후 출간
2. 생애
구자운은 1926년 11월 3일 부산시 중구 부용동에서 태어난다.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가 고향인 아버지 구명회는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의 인텔리였다. 시인은 1남 3녀 가운데 독자로 태어나는데, 두 살 때 심한 열병을 앓고 나서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진보통학교와 입정상업학교를 졸업한다. 1944년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여주로 간다. 그림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그는 이 무렵 문학은 물론 그림 공부에도 열중한다. 이런 습작 과정은 뒷날 그의 작품에 세련된 미의식이 스며드는 바탕이 된다.1945년 해방을 맞은 뒤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을 받자 그의 가족은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긴다. 아버지는 불구인 자식의 교육에 태만했지만, 구자운은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한 개업의의 영어 가정교사를 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어 1949년부터 동양외국어전문학교 노문과에서 수학한다. 그러나 6ㆍ25가 터져 학업은 중도에 접고 피난지 여주에서 읍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며 시 쓰기에 매달린다. 1954년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대한광업회에 취직을 하고 결혼까지 한다. 구자운은 1955년부터 1957년에 걸쳐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균열(龜裂)」「청자 수병(靑磁水甁)」「매(梅)」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그의 2회 추천작인「청자 수병」에 대해 서정주는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보탠다.<구군(具君)의「청자 수병」은 보시는 바와 같이 먼저 형식 세련에 있어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다. 이만큼 시의 말솜씨를 유창하게 마련해 가지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년 봄 그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였던 작품 「균열」의 의미 중심의 시업(詩業)에서부터 1년 잘 되는 동안에 그는 그의 정신의 운율까지를 마련하는 데 성공해 가고 있는 것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어 여간 반갑지 않다.ㅡ서정주, 『현대문학』(1956. 5.)> 이 시기에 그는 옛 항아리나 병과 같은 고기(古器)에서 느낄 수 있는 그윽한 정적미를 세련된 언어로 형상화해 1959년 제4회 ‘현대문학상’을 차지한다.
-장석주 시인,전 청아출판사 대표-
시인 고은과의 악연으로 유명하다. 구자운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줬는데 고은은 그 은혜를 구자운의 아내와 간통함으로써 갚았다. 구자운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렸고 본래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구자운은 홀로 아이를 키우며 번역으로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노동법이 있으나 마나했던 그 시절 알량한 번역료마저 떼이기 일쑤여서 형편은 좀체 나아지지 못했다. 불편한 몸, 믿었던 이의 배신, 가난의 고통을 폭음으로 달래던 시인은 그만 47세에 위암으로 요절하였다. 진짜 사이코 스릴러는 이 다음인데 문상객들이 찾아가보니 고은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 부어놓고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구자운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후포리에 묻혔다.
1972년 말 몇몇 일간신문의 문화면은 한 시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일 듯 말 듯 간단한 기사로 알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12월 14일 마흔여섯의 구자운 시인이 서울 면목동의 낡디낡은 전세방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이다. 사후 검사에서 그의 병명은 위암으로 밝혀졌지만 병원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임종은 어린 두 아들과 여동생이 지켰다. 구자운과 가까웠던 문인들은 생전의 그를 ‘한국의
바이런’ 혹은 ‘바이런 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한쪽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에 대한 맑고 순수한 열정이 영국 시인 바이런을 연상케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5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한 구자운은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의 시단을 이끌어 갈 뛰어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련히 번져 내려/구슬을 이루었네/벌레들 살며시/풀포기를 헤치듯/어머니의 젖빛/아롱진 이 수병으로/이윽고 이르렀네./눈물인들/또 머무는 하늘의 구름인들/오롯한 이 자리/어이 따를손가’ 생전의 유일한 시집 제목이며 그의 대표시인 ‘청자수병(靑磁水甁)’의 첫 구절이다. 과작인 편이었지만 그의 시편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조지훈을 연상케 한다는 찬사를 들었다. 현대문학상을 받았으며 61년에는
박재삼·박희진·성찬경 등 당대의 유망한 시인들과 함께 동인지 ‘60년대 사화집’에도 참여했다. 직장도 탄탄했고 미인으로 소문난 여성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아 어머니·여동생 등 여섯 식구가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동년배 문인들 중에서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기에 술 좋아하는 문인들에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대접을 했고 형편이 딱한 문인들을 돕기도 여러 차례 했다. 종로에 있던 그의 집[3]은 통행금지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술꾼 문인들의 숙소 역할을 했다.
4.19혁명 이후 직장을 잃은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2년여 실직 생활 끝에 송지영·
이어령이 국제신보[4] 사장에 취임하게 된 오종식에게 청탁해 부산에 내려가 국제신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게 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비극을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4년 오종식이 사장직을 내놓게 되면서 구자운도 2년 남짓의 부산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서울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그 전부터 눈이 맞았던 어느 시인을 따라 노모와 취학 전의 어린 두 아들을 내팽개치고 출분한 뒤였다. 그때부터가 고난의 세월이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누이동생마저 시집가 버려 어린 두 아들의 뒷바라지는 그의 몫이 되었다. 가세는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 전셋집을 전전해야 했고 대학 시절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던 인연으로 러시아어 번역 일에 매달렸으나 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는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 70년 초 구자운은 생애 마지막 직장을 갖게 되었다.‘월간스포츠’라는 잡지의 편집국장 자리였다.[5] 그 자리에 취임하면서 그는 직업 없이 빈둥거리는 후배 문인들로 편집진을 구성했다. 최범서·
황원갑·강홍규 등 소설가와 시인들이었다. 술꾼 문인들이 모였으니 쥐꼬리만 한 봉급은 늘 술값 대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 잡지는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의 매제가 운영하던 동양고속이 발행인으로 돼있었으나 실제로는 박종규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71년 9월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을 특집으로 다뤘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사격연맹 이사장인 박종규를 표지 인물로 다룬 것까지는 좋았으나 기사 속에서 사격장을 처음 구상한 사람은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다는 대목이 박종규의 분노를 폭발케 했다. 구자운을 비롯한 문인기자들이 박종규와 김형욱의 관계를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잡지는 즉시 폐간됐고 구자운은 1년 반 만에 또 실직자가 되었다. 다시 번역 일에 매달렸으나 알량한 번역료조차 떼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아들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재혼을 생각하고 한 젊은 여성을 집에 들였는데 그것이 마지막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죽음을 서너 달 앞둔 시점 그 젊은 여성은 구자운이 아이들의 학비 조달을 위해 차곡차곡 챙겨 두었던 몇 푼의 돈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의 주변에는 시 원고와 번역 원고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기사정규웅,문학평론가,중앙일보 문화국장,2009,중앙선데이-
고정일
동서문화사 사장은 문제의 시인이 곡기를 끊고 숨진 채로 발견된
면목동 집에서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출판사에서 러시아어 번역을 하던 분이라 한걸음에 그 시인이 숨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웃목에는 문제의 시인이 죽은 채 누워 있었고 요즘 문제가 되는 고모 시인(詩人)과 박모 소설가가 죽은 시인을 지키고 있었는데 광경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커다란 자배기에 막걸리를 잔뜩 부어놓고 시신(屍身) 옆에서 젓가락을 두들기며 '마하반야 바라밀다...'로 시작되는 반야심경을 읊조리고 있었다. 요즘 그의 과거 추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폭로들을 보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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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운이 월간스포츠 편집국장 시절 편집진이었던 황원갑 소설가가 2006년 6월 12일 온라인 '문협' 게시판에 '시인 구자운'이라는 제목으로 구자운을 추억하는 다음의 글을 게시했다.
나는 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시도 있고, 좋아하는 시인도 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현대 시인은 김수영과 신동엽과 구자운 세 사람 뿐이다. 특히 구자운 시인은 내가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분이기에 더욱 그립다. 돌이켜보니 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35년이 흘렀다. 1926년에 태어나 1972년에 이 별을 떠났으니 불과 47세,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보잘것없는 이 사람도 벌써 60이 넘게 살았는데 그처럼 아름답고 착한 시심을 더욱 밝게 꽃피워 빛내지 못하고 겨우 마흔 일곱에 죽다니, 참으로 아까운 한삶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구자운 시인보다 더 티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주인을 만난 적이 드물다. 불과 한 해 남짓한 인연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행운이며 축복이었다. 그는 내게 아버지 같았고 삼촌 같았고 형님 같았다. 그리고 그는 프란츠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내 인생과 문학의 스승이었다. 내가 구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겨울. 그해 9월에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하고 사회초년병이 되어 처음 취직한 곳이 구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월간스포츠라는 잡지사였다. 동대문7가 상가 3층에 있던 월간스포츠에는 구 선생을 우두머리로 하여, 나를 취재기자로 끌어들인 서라벌예대 동기생인 소설가 최범서, 역시 동기생인 소설가 이호일, 시인 정원모, 그리고 나중에 바둑평론가가 된 강홍규, 사진기자 장하일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구자운, 정원모, 강홍규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최범서와 장하일만 처자식을 거느리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꾸려나갔을 뿐, 구 선생은 두 아들을 버려둔 채 부인이 달아나버린 홀아비, 나머지는 모두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천하무쌍의 불한당, 바람둥이, 파락호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차반 기자단이었다. 따라서 1만원 안팎의 월급은 달마다 외상술값 틀어막기에도 태부족이었다. 구 선생은 두 아들의 학비를 위해 남는 시간에 번역 일을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날강도 같은 악덕 출판업자가 많아서 며칠 밤을 새고도 형편없는 번역고료를 받았다. 그래도 구 선생은 찾아오는 친구를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반겨 맞았다. 얼른 기억나기에 시인 문덕수와
천상병과 민영과 신동문, 소설가
서기원과
이호철, 평론가 민병산 등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이도 있지만 이들이 찾아오면 구 선생은 3층 사무실에서 1차로 2층 하이웨이다방으로 데리고 내려가 차를 한 잔 대접하고, 그리고 마감시간이 아니면 2차로 상가 뒷골목의 대폿집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후배도 자주 어울렸지만, 구 선생은 찾아오는 벗들은 누구든 마다 않고 반겼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에 은은한, 비밀스러우면서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채우고 또 비웠다. 구 선생의 별명 ‘바이런 구’는 내가 지어준 것이다. 이는 그의 다리가 바이런과 같이 한 쪽이 불편한 것을 빗댄 것만은 아니다. 신체적 공통점을 넘어 두 사람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용기로 비상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순수한 열정의 시심에 나는 무한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생전에는 그의 시집을 본 적이 없다.[6] 요즘은 문단이라는 속물의 울타리 속에 기어들어가기가 무섭게, 아니, 그 틀 속에 들어가려는 방편으로 자비출판을 합네 하면서 볼품없는 시집, 소설집을 찍어내는 몰염치한 엉터리 문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내 가슴 속의 진정한 ‘계관시인’이었던 구자운은 죽을 때까지 시집 한 권 내주는 놈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사후에 나온 유고시집 <벌거숭이 바다>(창작과비평)는 친구 민영이 엮어준 것이다. 1971년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개차반 기자단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나는 춘천으로 내려가 바람둥이 총각시절을 마감하고 무서운 시골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아들 녀석, 즉 내 손자 병준의 아비가 태어난 해 연말에 최범서로부터 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최범서, 정원모 등과
면목동 그의 셋방으로 문상을 갔다. 그의 셋방 한구석에서 나는 그 지난해에 내가 빌려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발견했다. 아하! 구 선생! 그 동안 무슨 꿈을 꾸고 어떻게 풀이하며 마지막 날들을 보내셨소? 물어보나 마나 죄다 악몽이었겠지만. 으흐흐흑! 그런데, 시인 구자운, 인간 구자운이 비참한 말년을 보낼 때 그의 살림살이를 돌봐주던 여인을 꿰차고 달아난 철면피, 파렴치, 몰염치, 패륜막덕한 인간 쓰레기가 있었다. 또 그런데, 그 자가 지금도 민족시인이니, 원로시인이니 하면서 행세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후천개벽을 고대해야 할 말세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더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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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소설가는 게시글에 달린 '그 민족시인, 원로시인이 누구냐'는 질문 댓글에 그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고 하였다.2002년 시인 민영은 구자운 시인을 아래와 같이 추억했다.
"1957,8년쯤 처음 만났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 사람들이 돌아오고, 다방이 생기고, 극장이 문을 열면서 명동이 살아나기 시작했어. 그땐 모두가 직업이 없으니까 주머니가 비어 향유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잡지사나 교사를 하는 친구가 명동에 오면 말 그대로 벗겨먹었었지. 그리고 그들이 명동에 오는 것은 벗겨질려고 오는 거였고. 그래서 그들은 즐겁게 벗었어. 맥주병에 담긴 막걸리는 좋은 술이었지. 맑은 동동주에 코다리 말린거나 두부김치면 아무리 좋지 않은 술이라도 취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좋았어. 거기에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성찬이었어.그때 구자운은 두둑한 월급봉투를 타는 회사원이었어. 대한광업회 총무부장이었으니 요새 돈으로 한 오백만원은 받았을라 몰라. 그러니 파락호같은 친구들이 그에게서 술을 얻어먹고 용돈도 얻어쓰고 그랬지. 지금은 다 성장하여 우리나라 문학계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던
고은, 박성룡과 박봉우,
김관식 등이 제일 귀찮게 했어. 한번은 구자운의 모친께서 부르더래. 그 분 말씀이 김동리나 서정주는 못 데려오고 고은이나 김관식이나 데려오냐고. 하하하 그럴만도 하지.그 후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독재에 맞서 싸우는 일이 있었지. 그 후로 수유리에 묻힌 어린 영혼들을 보면 괜시리 눈물이 나곤했어. 그 나이에 정치의식이 있었겠나. 그저 죄없는 우리 오빠 쏘지 말아요 하다가 총에 맞았겠지...그때 우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진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가를 다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허위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전후 문학인 협회'를 창립하게 되었지. 당시 20~30세였으니까 지금은 60~70세가 되었겠지. 명동에 있는 음식점에서 약 50명이 모였는데 구자운이 간사가 되었어. 구자운은 오른다리가 왼다리보다 짧아서 잘룩거렸는데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말수도 없으면서 '헬리콥터로 삐라를 뿌리겠다'고 할 정도로 흥분했었지. (중략) 아마도 겨울이고 밤 아홉시쯤 되었을거야. 박봉우가 구자운의 집에 가자는 거야. 그 집이 어딘지 몰랐었는데 구형구형~ 구자운구자운~하면서 동네가 터내려가도록 부르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었어. 한 삼분, 오분 불렀을까 잠옷차림의 구자운이 우릴 방으로 안내했지. 나보다 크지 않은 키에 잘룩거려서 산각(散脚)돌이라고 불렀지. 서먹서먹해서 시나 읽고 빼서 읽고 있는데 구자운이 차나 내오지라는 말에 잠시 후에 방석 두 개와 차를 내오는 부인을 보게 되었어...집에 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아냐." 부인이 키도 크고 늘씬해서 구자운의 짝일까 싶을 정도였나보다. 그의 지위와 환경에 맞을 것도 같았지만 왠지 낯선 기운이 있었나보다. 그것은 곧 구자운의 뒷 이야기를 말해준다. "말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구자운은 전후문협 창립 이듬해 5.16이 있던 해 대한광업협회에서 면직을 당했어. 아마도 곧은 말을 많이 해서인 듯 싶었지. 말이 없으면서도 위험적 발언을 많이 했었던 듯 싶어. 결국 시인으로 살수가 없던 구자운은 고향인 부산으로 낙향을 했어.
국제신문 논설위원 자리를 가지고 말이야. 지금이야 대접이 좋지만 그땐 논설 한 편에 얼마였으니 가난한 논설위원이었지. 그러던차 형님 같고 선생님 같은 구자운이 낙향하다보니 의문이 생겨도 물어볼 데가 있어야지. 그래서 두어차례 편지를 보냈지. 마침 발레리의 시를 읽다가 의문점이 생겼거든 (의문점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 보름만에 답장이 왔는데 안부도 없이 시 해석만 적어서 보냈던거야" 아마도 그는 그가 누리던 생활이 바뀌자 생활고에 많이 시달린 듯 하다. 안부도 물어볼 수 없을만큼 힘겨웠음이리라. 낭만이 한껏 있을 때가 서울 생활이었다면 현실에 충실해야할 때는 부산 생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부인은 나갔단다. 그 이유는 생활고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데 그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선 시인도 입을 다물었다. 그저 미뤄 짐작하라는 듯.(중략) 진눈깨비 내리던 밤. 종이에 적어준 지도를 들고 면목동을 찾아갔더니 조그마한
조선집이 나오더란다. 술집 여자랑 같이 살더란 말이 있었는데 쌀 한 톨 없고 중학교 다니는 아들 둘이 상복도 없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쪽에서
고은이 목탁을 두드리고. 박경수(소설가),
박재삼이 있었단다.
하니리포터 김명신,2002.1.한겨레
1960년을 고비로 그의 시에는 변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구자운은 1960년 4월혁명을 통해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예전과는 달리 부쩍 사회적 관심을 드러낸다. 이어
5.16정변을 겪으며 그는 시인의 사회적 소임을 자각하고 현실 인식과 날카롭게 벼린 정치 감각에 바탕을 둔 시를 써낸다. 그는 당시 젊은 문인군이던
고은,권태웅,김동립,박성룡,박희진,
서기원,송기동,송병수,안동림,이경남,이문희,
이호철,정인영,주명영 등과 ‘전후문인협회’에 참여해 간사를 맡는가 하면,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도 활약한다. 이 무렵이 구자운으로서는 가장 무르익은 시를 써내는 한편 문단 활동도 왕성하게 펼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시에 한층 물이 오른 그는 시 쓰기에만 전념하기 위해 대책도 없이 직장인 대한광업회를 그만두어[7] 살림은 더욱 곤궁해진다. 얼마 뒤 그는 생계를 잇기가 버거워지자 한동안 『국제신보』 논설위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명색이 논설위원임에도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해 생계에 거의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마저 2년 만에 작파한 데 이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아내조차 그를 외면해버려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시인은 번역을 하거나『월간스포츠』 편집장으로 근무하는 등 이 일 저 일에 손을 대지만 살림은 좀처럼 펴지 않는다. 가난과 불구와 가정적 불행에 목덜미를 잡힌 채, 오로지 불운과 불행에 의해서만 견인되는 삶을 참담하게 끌어안고 있던 시인은 그 슬픔과 비장함을 시 '벌거숭이 바다'에서 노래한다.(중략)1969년 구자운은 첫 시집이자 생전의 마지막 시집이 되고 만『청자 수병』을 펴낸다. 가난과 평생 떠나지 않은 불운을 버무려 빼어낸 서정으로 빚어낸 이 단 한 권의 시집으로 구자운은 한국 현대 시사의 한 귀퉁이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즈음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견지동의 집을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10여 채의 집을 지어 집장사에 나서는데,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다른 장사꾼들과 경쟁이 안 된다. 섣불리 집장사에 나선 시인은 이문은커녕 누적되는 손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재 값을 물지 못하는 등 고생만 하다가 결국 밑천까지 날리고 만다. 빈털터리가 되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어지자, 1971년 그는 궁색한 살림을 더 줄여 두 아들을 데리고 동대문구 면목동의 셋방으로 이사한다. 이듬해인 1972년 12월 15일 오전 10시, 오랫동안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시인은 그 면목동 셋방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그의 시 전집『벌거숭이 바다』가 나온 것은 뒤늦게나마 구자운이 누린 지복(至福)이라고 하겠다.
-장석주 시인,전 청아출판사 대표-[8]
3.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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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龜裂) (1955)
그건 어떤 깎고 닦은 돌 면상(面相)에 균열(龜裂)진 금이었다. 어떤 것은 서로 엉글려서 설형(楔形)으로 헐고 어떤 것은 아련히 흐름으로 계집의 나체(裸體)를 그어놨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천천히 구을러 또 나체(裸體)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금의 균열(龜裂)진 아스러움이 -그렇다 이건 우발(偶發)인지 모르지만 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 때로 나로 하여금 허황한 꿈속에서 황홀히 젖게 함이 아니런가? 고 |
- 청자수병(靑磁水甁) (1956)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들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水甁)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풀음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지은 달이랗거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러진 운학(雲鶴)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여! 오, 저으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水甁)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雨露)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 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
- 벌거숭이 바다 (1964)
비가 생선 비늘처럼 얼룩진다. 벌거숭이 바다. 괴로운 이의 어둠 극약(劇藥)의 구름 물결을 밀어보내는 침묵의 배 슬픔을 생각키 위해 닫힌 눈 하늘 속에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바다, 불운으로 쉴 새 없이 설레는 힘센 바다 거역하면서 싸우는 이와 더불어 팔을 낀다.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말없는 입을 숱한 눈들이 에워싼다. 술에 흐리멍텅한 안개와 같은 물방울 사이 죽은 이의 기(旗) 언저리 산 사람의 뉘우침 한복판에서 뒤안 깊이 메아리치는 노래 아름다운 렌즈 헌 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 |
- 실직(失職) (시문학,1971.11)
하늘 끝으로 고가도로가 뻗쳤는데 -우리는 실직하였다. 우람스런 거인의 팔을 들어 하늘을 움켜잡으려는 기름진 밤의 고가도로. -그렇지만, 우리는 실직하였다. 그럴 수가 있느냐? 우리들은 화성인인가? 머리들만 커다랗고 동체랑 팔다리랑 베베 꼬여 테이프를 늘어트린 밤의 산보자? |
- 일하는 者의 손에 대해서 (1972)
일하는 자의 손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자는 말하지 마라. 한밤중에도 쉬지 않는 기름때 톱니바퀴. 쓰라림을 벗하며 살아가는 자의 노래를 듣는가? 듣는가 손은 만든다, 역사의 진리를. 파도가 모두 다 휩쓸어 간 다음에도 남아 있을. 은밀한 가운데 서로 잡은 것들 엉클어진 질기디질긴 의지들이다. (하략) |
- 가을의 부랑자(浮浪者)
오늘은 가을바람이 불고 나무들이 울고 있네. 나는 빈털터리, 모두 다 마셔 버리어 이젠 어쩔 도리도 없이 되었다. 이 거리는 아무도 내 일거리를 팔아 주지 않는다. 텡 비어 냉기 휘모는 통풍관을 둘러메고, 뒷거리를 헤메는 나는 부랑자. 슬프구나, 길 잃은 개보다도 외롭고 갈 데 없는 주정뱅이. 어둠만이 물귀신의 바다로 머리 위를 꽝꽝 울려 터진다. 나는 벌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냐? |
- 모두 다 떠나 버린 다음
너희들이 모두 다 떠나 버린 다음 나도 천천히 일어나 가리라. -어둡고 고된 나달[9]이여, 내 사랑, 변함이 없는 길이라면 진실을 찾아 헐벗고 방황하는 것은 아름답고 외로운 깃발이리니. 그러나 너희들 웃음을 마련하여 모두들 훌훌히 떠나 버린 다음에 남는 것은 이지러지고 서러운 모습들. 괴로움에 등을 지고 가 버린 이를 탓하지 말자. 다만 말하리라, 우리들 더불어 한 때를 예 있었거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