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구로다 당주
구로다 나가히로 黒田長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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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811년 4월 23일 | ||
무사시국 도지마군
에도 시마즈 저택 (현 도쿄도 미나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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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7년 3월 7일 (향년 77세) | ||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구로다 저택 (현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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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5대 구로다 당주 | ||
1834년 11월 6일 ~ 1869년 2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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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나가히로(長溥) → 나리히로(斉溥) → 나가히로(長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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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 모모지로(桃次郎) | ||
통칭 | 간베에(官兵衛) | ||
부모 |
친부 시마즈 시게히데 친모 마키노센사 양부 구로다 나리키요 양모 호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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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후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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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다 나가히로는 에도 막부 말기 치쿠젠노쿠니 후쿠오카번의 11대 번주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소울메이트 나리아키라와 더불어 답도 없는 난벽[1] 다이묘로 유명하다.2. 생애
본디 시마즈 가문 출신으로 분카 8년(1811년) 사츠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와 그의 측실 마키노센사(牧野千佐) 사이에서 시게히데의 13남으로 태어난다. 시게히데는 못말리는 난벽 다이묘였는데, 친아버지의 난벽을 물려 받은 건지 나가히로는 어릴적부터 두살 위의 친척조카 나리아키라[2]와 더불어 사이좋게 서양 문물 덕질을 하며 보냈다.분세이 5년(1822년) 제10대 후쿠오카번주 구로다 나리키요(黒田斉清)[3]와 정실부인 호린인(宝林院)[4]의 딸 쥰히메(純姬)와 결혼, 구로다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다. 양부였던 나리키요처럼, 쇼군 이에나리(家斉)의 편휘에서 따와 구로다 나리히로(黒田斉溥)로 개명하는데, 훗날 다시 나가히로(長溥)로 되돌려서 오늘날 알려진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텐포 5년(1834년), 아버지 나리키요가 은퇴함에 따라 24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 취임 후에는 (친/양)아버지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해서 서양문물과 서양기술의 슥듭에 경도된 번정을 펼쳤다. 덕분에 번사들 중에서는 후쿠오카현 최초의 시계가게나 사진관을 여는 자들도 나왔으며,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증기기관 제작법을 들여오거나 의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카에이 3년(1850년), 본가 시마즈 가문에서 가독 상습과 관련된 소동이 일어난다( 오유라 소동). 당시 시마즈 본가는 당주 나리오키의 적장자 나리아키라와, 나리오키의 애첩의 아들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사이의 파벌로 나뉘어 분쟁을 벌였는데, 나가히로도 친인척이자 친-나리아키라 파벌의 좌장으로 참전한다. 그는 후쿠오카 번주의 자격으로 외교전을 벌여 우와지마(宇和島)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후쿠이(福井)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5] 등에게 사태의 수습을 요청, 익년 카에이 4년(1851년)이 되어서는 가독분쟁의 중개역으로 참가해 나리아키라의 가독상속에 공을 세운다.[6]
카에이 5년(1852년) 11월, 후쿠오카, 사가, 사츠마번은 막부로부터 페리선이 내항할 예정이라는 첩보를 전달받고, 해안 경비의 임무에 맡겨진다. 동년 12월, 정보를 전달받은 나가히로는 에도 막부에 개화 정책[7]과 관련된 의견서를 제출한다.
안세이 6년(1859년), 일본을 방문한 시볼트가 해부학 강좌를 열자 다이묘가 직접 참석, 시신해부에도 직접 손을 댔다고 한다. 시신해부는 동시대 일본인들에겐 꽤 충격적이었는지 후쿠오카 번주의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답도 없는 난벽 다이묘로서의 명성/악명을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겐치 원년(1864년), 참의가 되어 치쿠젠 재상(筑前宰相)의 별명을 얻는다.
케이오 원년(1865년), 후쿠오카번내의 극단적인 근왕양이/도막파 성향의 번사들을 탄압했다(乙丑の獄:을축의 옥). 이때 갈려나간 번사들 중 한사람은 치쿠젠근왕당의 리더였던 츠키카타 센조(月形洗蔵)인데, 삿쵸 동맹의 초안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했다.[8] 그런데 이 즈음 부터는[9] 사츠마와 쵸슈번 사이를 중재하고, 막부 측에 쵸슈번의 사면활동에 나서서 막부와 삿쵸를 중재하는 등 외교활동에 나섰다. 이 시절 나가히로의 중재외교 중에 예토전생한 인물이 사이고 타카모리인데, 선대 당주 나리아키라의 파벌이었던 타카모리는 1858년 나리아키라가 급사하고[10] 반대파의 수장 히사미츠[11]가 국주에 오르면서 타카모리의 번내 정치적 입지가 급속도로 좁아졌다. 안세이 대옥을 핑계로 히사미츠는 나리아키라 파벌의 행동대장이었던 타카모리를 촌동네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타카모리는 3년 후에야 카고시마 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타카모리가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은 다시 정치적으로 격돌,[12] 타카모리는 다시 아마미 군도(오오시마군) 깡촌으로 유배당한 상황이었다. 번주에게 찍혀서 시골 섬에서 평생 썩을 운명[13]이었던 타카모리의 사면/복권 활동에 힘써준 것이 (시마즈 가문 내에서 친-나리아키라 파벌이었던) 구로다 나가히로라고 한다.
메이지 초기 무렵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름을 나리히로에서 나가히로로 되돌렸다. 이후 메이지 2년(1869년) 2월 5일, 은퇴하여 츠 번 토도 가문 출신 양자인 구로다 나가토모에게 가독을 물려줬다.
3. 정치적 성향
나가히로의 정치적 성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단어는 초강성 개화파라고 할 수 있다.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소꿉친구이자 정치적 동지가 모두 서양문물에 심취해있던 난벽 다이묘였기에, 자연스럽게 나가히로도 서양의 학문과 기술, 문물에 심취했고 결국은 현직 정치인이 시신 해부학 수업에 들어가는 사고를 치기에 이르기도 했다. 이 문제에 한해서는 을축의 옥도 대단히 쉽게 설명되는 편으로(개화파 번주가 양이파 번사들을 탄압함), 양이론의 차원으로 한정하면 나가히로는 뚝심있고 일관적인 개화파의 성향을 보여준다.[14]좌막/도막 성향에 관련해서는 매우 복잡해진다. 근본적으로 그는 시마즈 문중의 인사들 중에서도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동세대의 인물로, 도막 성향이 강하던 신세대 사이고와는 달리 아츠히메 입궁(1846)을 전후로 막부 내 여당으로서의 잘나가던 좌막파 시마즈[15] 시절의 성향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을축의 옥에서는 존양파 번사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동시에 근왕파[16]라는 묘사도 보이고, 공무합체 운동에 나섰다는 등[17] 존왕론에 관련해서는 태도가 왔다갔다 하거나 자기모순을 동시에 내재하는 등 복잡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18] 나가히로를 포함한 시마즈 문중의 인사들이 히토츠바시파에서 멀어지는 시기는 요시노부의 집권 이후의 일인데, 특히 요코하마 개항 문제를 둘러싼 참예회의에서 요시노부가 시마즈 국주 히사미츠와 극한으로 대립하고, 이를 기점으로 나가히로의 후쿠오카번이 밀던 공무중재(公武周旋) 전략도 붕괴하면서 시마즈 문중과 히토츠바시 친위세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겨버린다.[19]
나가히로의 마지막 특징은 그가 매우 겁쟁이라는 점이다. 사실 젊은 시절(1852년) 막부에 견백서를 넣어 페리선을 맞이하는 막부의 무책임을 질타하고 개화를 주장하던 모습만 보면 용감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일본 위키피디아(특히 을축의 옥 문서)와 연구논문들에서는 후쿠오카 번주의 나약함과 유약함, 우유부단함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겁쟁이로 성격이 변하게 된 계기는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죽음인데, 쇼군의 후계자 선정 문제[20]로 교토로 올라가 이이 나오스케에게 항의하려던 도중 콜레라로 급사한 것이다. 나리아키라의 급사 소식을 듣고 나가히로는 그가 암살당한게 아닌가 불안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암살 음모론이 나올만 한게, 하필이면 나리아키라가 죽은 그 해가 안세이 대옥(나오스케가 정적들을 숙청한 사건)이 있던 1858년이었기 때문이다.
4. 관련항목
[1]
서양 문물에 심취한 서양덕후. 기본적인 성향은 개화파다.
[2]
시게히데의 증손자로, 시게히데 장남 나리노부(斉宣)의 손자이다. 13남 쯤 되니 1남의 손자와 나이가 비슷해진다.
[3]
나가히로의 친아버지인 시게히데, 나가히로 본인과 더불어 양부 나리키요도 난벽이 심했다고 한다.
[4]
호린인의 아버지가
니조 가문의 귀족(二条治孝)이었기 때문에, 나가히로와
공경들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본명보다는 호인 슌가쿠(春嶽)가 더 유명해서, NHK 대하드라마 등에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에치젠은 후쿠이의 옛 이름이다.) 슌가쿠 등으로 불린다. 당장 한국 위키피디아 등재어도
마츠다이라 슌가쿠로 되어있다.
[6]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밀던
히토츠바시 파벌의 원년 멤버들이다. 사츠마의 나리아키라, 우와지마의 무네나리, 에치젠의 슌가쿠, 여기에 토사번주 야마우치 토요시게(山内豊信)를 넣어 막말 사현후(막부 말기의 네 명의 현명한 다이묘들)라고도 부른다. 이들 파벌은 훗날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고산케 출신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를 밀던
이이 나오스케의 파벌과 정면 충돌하고,
안세이 대옥의 직격탄을 맞는다.
[7]
존 만지로의 등용, 해군 창설 등을 요구하며 막부의 무방비 상태를 비판했다고 한다.사실강 막부에 갖다 박은건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때만 해도 용감해 보인다.
[8]
애초에 근왕이라는 키워드로 간신히 공존해 왔을 뿐, 극단적인 개화파 성향의 번주와 극단적인 양이파 성향의 번사가 정치적으로 갈라서는 건 정해진 운명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의 나가히로는 자기모순적 모습(막부의 번주로써 혹은 좌막파 시마즈 가문의 인사로써 보여주는 성향 vs 근왕파 혹은 공무합체파로서의 성향)을 내재하고 있었는데, 이를 포함한 정변의 성격, 을축의 옥 전후 후쿠오카번의 정치권력 상황 등에 대해서는 니시오 요타로의 연구(西尾陽太郞, 1967, 구로다 나가히로와 치쿠근왕파)를 참조.
[9]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케이오 원년 이후부터라는 식으로 써있지만, 연구들에 의하면 치쿠젠의 공무중재(公武周旋) 외교전략은 이미 분큐 3년(1863)에도 활동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지와라, 1992)
[10]
콜레라가 사인이라지만, 시절이 하수상하던 때였던 만큼(
안세이 대옥이 일어난 바로 그 해다.) 독살이라는 음모론도 있었다고 한다. 나리아키라와는 소꿉친구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막역했던 나가히로에게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준 듯 하다.
[11]
나리아키라의 사후, 시마즈 가문은 타다요시가 가독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타다요시가 히사미츠의 아들이기 때문에, 히사미츠는 당주의 아버지로써 가문의 정치에 거시적인 영향을 끼치는 실세로 활동했다.
[12]
히사미츠는 사이고의 전국적인 지명도를 이용해 자신의 중앙정계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으나, 사이고는 히사미츠를 그릇이 작은 일개 번주로 여겼다.
[13]
사츠마가 영국이랑 한판 붙은
사츠에이 전쟁(1863) 때도 타카모리는 아마미 군도 오키노에라부 섬에 유배 중이었다.
[14]
한가지 유의할 점은, 나가히로가 속해있던 초창기
히토츠바시파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존황양이를 내세우는 그룹이었다는 것이다. 정작 웅번들은 근대화/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집단이었는데, 하급 무사들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존황양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뒤, 수틀리면 양이 성향의 과격파들을
숙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세한 사항은
존황양이 문서의 존황양이파의 성격 항목을 참조.
[15]
삿쵸 동맹으로 도막 선봉의 이미지가 강한 시마즈 가문이지만, 1차 쵸슈정벌 시절(1864) 까지만 해도 막부 쪽에 붙어서 쵸슈를 때리던, 엄연한 좌막파 성향의 번이었다.
[16]
양어머니의 친정집이었던 교토 귀족들과 연결되는 등 복잡해진다.
[17]
카지와라 요시카즈, 1992, 쵸슈출병을 둘러싼 정치정황 -후쿠오카번의 쵸슈중재활동을 중심으로-
[18]
을사의 옥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상기한 연구를 참조: 니시오 요타로(西尾陽太郞), 1967, 구로다 나가히로와 치쿠젠근왕파
[19]
마찬가지로 주의점은 i)저 공무운운 하는 것도 시대와 화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웅변 중심의 체제인지, 요시노부 중심의 체제인지, 천황 중심의 체제인지, 등등); ii) 위에서 언급된
존황양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뿐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때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황 중심의 체제는, 천황을 허수아비로 내세울 뿐이었다.
[20]
나리아키라가 밀던
요시노부가 떨어지고,
이이 나오스케가 밀던
이에모치가 후계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