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년
조예가 딸인
조숙이 요절한 일로 인해 종손인 견황과 합장시켰는데, 곽덕을 견황의 후계자로 해서 견(甄)씨 성을 계승하도록 하면서 평원후로 책봉해 조숙의 작위를 계승하게 했다. 역사가인
손성은 예법에 부인이 이미 봉작을 받은 일이 없는데, 아이에게 대읍을 봉하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하면서 이 일에 대해 비판했다.
251년에
사마사가 집권하자 그의 딸과 결혼했다가 처가 일찍 죽자
사마소의 딸인 경조장공주와 결혼했는데, 사마사, 사마소는 곽덕과 맺어지고 싶었기에 빈번하게 혼사를 치른 것이다. 곽덕은 재주나 학식은 없었지만 공경스럽고 근면하면서 겸손하고 온화했다.
254년 조방 폐위 당시 폐위를 주창하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
264년에는 광안현공에 봉해졌다가 서진이 건국되면서 265년에 특진의 자리가 더해졌으며, 종정, 시중 등을 지냈다. 282년에
사마유가 산동으로 부임하는 와중에
왕제와 함께 산동에 부임하지 않도록 간청해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훌륭하게 여겼으며,
사마염은 곽덕을 훌륭하게 여겨 대홍려에 임명하고 시중, 광록대부를 더했지만 곽덕은 얼마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자 중군대장군으로 추증하고 개부시중은 전과 같이 하면서 시호는 공공(恭公)으로 했으며, 아들인 곽희가 후사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