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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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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리3. 역사
3.1. 근대3.2. 근현대
4. 경제

1. 개요

Guayaquil. 에콰도르 서부의 도시. 정식 지명은 '과야킬의 산티아고(Santiago de Guayaquil)'이다. 인구는 약 330만 명으로, 수도는 아니지만 인구 및 경제 규모상 최대 도시이다. 수도는 내륙의 키토. 해안 도시는 아니지만 과야스 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에콰도르의 수출입 항구로 기능한다.

강변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치안이 불안해진다. 특이하게도 도심부 과야스 강가에 호세 호아킨데 올메도 국제공항이 있는데, 주로 갈라파고스 여행을 위한 경유지로 기능한다. 근현대 시기 수 차례의 자연재해로 시내의 볼거리는 거의 없다. 과야킬 시티 FC의 연고지이다.[1]

2.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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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킬 만을 앞에 둔 과야스 강의 하류에 바바 하요 강이 흘러드는 합류 지점에 위치한다. 사진에서 위쪽이 바바 하요 강과 그를 가로지르는 교량이다. 오른쪽이 더욱 커진 과야스 강의 하구 방향.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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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옛 건축물들

1538년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에 의해 세워졌다. 지명은 당시의 원주민 부족장의 아름에소 유래되었다. 필리핀 ~ 아카풀코 ~ 리마의 교역로에 위치하여 태평양 연안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번영하던 도시는 17-18세기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1687년 4월, 260인의 영국 및 프랑스 해적들이 공격하여 해적 35명이 죽고 수비대 75명이 사망했다. 1709년에는 영국의 해적 겸 제독 우드스 로저스, 윌리엄 댐피어 휘하 110인이 시내를 약탈하고 몸값을 요구했다가 역병이 돌자 철수하기도 했다.

스페인 지배기 과야킬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조선소 중 하나가 있었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흑인 노예였다. 따라서 18세기 무렵 에콰도르 일대의 노예들은 대부분 과야킬에 있었다. 미국과 달리 현지 흑인 노예들은 주인과 따로 살며 세금을 내는 일종의 외거노비 (jornalado)로, 비교적 독립적이었다. 1800년을 전후로 하여 그들은 플레베란 조직을 결성하여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중 마리아 치퀸퀴라는 에콰도르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3.1.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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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킬 자유주 시절의 국기이자 현재의 시기

중남미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820년 10월 9일, 과야킬 시민들은 현지 주둔 병력과 함께 봉기하여 왕당파 세력 및 스페인 관리들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무혈 혁명 직후 도시는 독립을 선포, 과야킬 자유주가 되었다. 이때 행정 장관으로 추대된 호세 데 올메도는 현재 과야킬 공항 이름으로 남았다. 1822년 5월, 안토니오 수크레 장군은 과야킬과 페루 등지의 병력을 이끌고 도시를 떠나 피친차 전투에서 스페인 군을 격파하고 키토를 해방하였다. 이로써 그란 콜롬비아의 독립이 확보되었다.

전투 직후, 그해 7월에는 남미의 양대 독립군 사령관 호세 데 산 마르틴 시몬 볼리바르가 과야킬에서 회동하여 남미 독립 전쟁의 미래를 논하기도 하였다. 그 직후 과야킬 자유주는 그란 콜롬비아에 흡수되었다. 다만 그란 콜롬비아가 혼란에 빠진 1829년, 페루군이 침공하여 7개월간 점령하였고 결국 이듬해 그란 콜롬비아는 해체되어 과야킬은 에콰도르에 속하였다. 1857년부터 시작된 페루와의 영토 분쟁은 에콰도르를 약화시켰고, 1859년 9월 과야스 군사령관 기예르모 프랑코가 과야킬에서 거병하여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에 키토에서는 (역시 과야킬 태생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임시 정부가 꾸려져 내전으로 이어졌다. 프랑코는 과야스 강 하구에 주둔하던 페루 함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분쟁지를 할양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고, 이에 민심이 이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레노 정부군이 반격에 나서자, 연패한 프랑코는 과야킬에서 버티다 결국 1860년 9월의 과야킬 전투에서 패배하고 페루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에콰도르는 페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재통합을 이루고, 근대 국민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3.2.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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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안나 언덕 일대의 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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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킬 외곽의 빽빽한 주거 지역

1896년 대화재가 일어나 시가지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1898년 과야킬 시의회는 10월 9일 혁명을 기리는 시가 (市歌)를 제정하였다.

1922년 도시의 노동자들이 3일간 파업에 나섰다가,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3백여명이 희생되는 참극이 있었다.

1924 ~ 1937년 과야킬 대성당이 세워졌다.

1942년의 지진으로 재차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962년에는 근대적인 항구가 완성되었다.

2020년 코로나 초기에는 의료 및 장례 체계가 붕괴하여 길거리에 시신이 방치되는 비극도 있었다.

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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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킬은 에콰도르 최대의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과야킬 항은 에콰도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고, 그 주변에 각종 공장들이 몰린 산업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외에 어업과 암흑 경제도 활성화되어 있다.


[1] 가끔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이 여기서 홈경기를 하기도 한다. 근데 이 도시는 해발고도 4m라서 고산지대라는 홈 어드벤티지를 하나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키토에서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굳이 홈 어드벤티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과야킬에서 경기를 하는 날이 가끔 있다.